수학올림피아드 ‘북한 천재’ 리정렬, 서울대생 되다

  • 신동아
  • 입력 2019년 8월 24일 16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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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역사도 배우지 않고 수학만 팠어요”

● “수월성 교육? 북한은 철저해요”
● 서울과학고 거쳐 수시전형으로 서울대 입학
● 미국 유학 돕겠다는 제안 듣고 검토 중
● 불면증 시달리고 생활고 겪기도
● “아버지가 탈북 격려했다”는 건 잘못된 보도
리정렬군.
리정렬군.
잘생겼다. 헌칠하다. 키가 180㎝다. 1998년 평안남도 평성시에서 태어난 ‘수학 천재’. 3년 전 홍콩에서 열린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은메달을 딴 후 탈북했다.

홍콩 국제수학올림피아드 마치고 탈북

리정렬(21) 군은 2016년 7월 17일 주룽(九龍)반도 홍콩과학기술대 기숙사를 빠져나와 란타우섬 홍콩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가면 한국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항에서 홍콩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에 전화했다. 18세 소년은 택시를 타고 총영사관으로 향했다.

북한 천재 소년의 탈북은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됐다. 애틋한 부정(父情)이 특히 주목받았다. 한국 언론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를 인용해 대서특필했다. SCMP는 “북한을 떠나기 전 강원도 중학교 수학 교사인 아버지에게 탈북 의사를 알렸으며, 아버지는 200달러를 쥐여주면서 ‘걱정하지 말고 가라’고 격려했다”고 보도했다.

사실과 다른 이 보도는 청년이 된 ‘이정호’ 군에게 지금껏 아픔이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탈북 계획을 아버지께 말한 적 없다. 고향도 강원도가 아니라 평안남도”라고 했다. 북한의 천재 소년 ‘리정렬’은 서울대생 ‘이정호’가 됐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개명(改名)했다. 2018년 3월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한국 생활은 고단했다. 잠이 오지 않아 약을 처방받았다. 생활고(生活苦)도 겪었다. 정부는 탈북민에게 정착금 700만 원(1인 가구 기준), 주거지원금 1300만 원을 준다. 중·고등학교 및 국립대 등록금은 면제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매달 50만 원가량 지원받는다.

새로운 환경에서 사느라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를 겪었으나 이제는 적응했다. 서울의 임대아파트에 산다. 대학교는 1학기만 다니고 지난해 9월 휴학했다. 8월 21일부터 석 달간 미국에 체류한다. 탈북민 미국 연수 지원 사업에 응모해 합격했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4차례 은메달을 목에 건 그를 7월 26일 만났다.

- 어떻게 지내요.

“처음엔 적응이 힘들었죠. 이젠 괜찮아졌어요.”

- 키도 크고 잘생겼네요.

“하하.”

- 살이 조금 쪄야겠어요. 너무 날씬하다.

“58㎏이에요.”

‘부자 도시’ 평성의 중산층 가정 출신
2016년 홍콩과학기술대학에서 열린 제57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한 북한 대표단. [페이스북 챕쳐]
2016년 홍콩과학기술대학에서 열린 제57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한 북한 대표단. [페이스북 챕쳐]

한국에 와 서울과학고에 입학했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한국 대표단을 이끌어온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가 도움을 줬다. 북한이탈주민 특별전형이 아닌 수시전형으로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학생들과 똑같이 경쟁해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고교 졸업 후 미국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어떻게 준비하는지 정보도 없었고요. 미국은 말도 우리와 다르잖아요. 미국에 가 공부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 고향은 어디예요.

“평성요. 강원도는 언론이 잘못 보도한 거예요.”

- 큰 시장 있는 평성?

“맞아요.”

평안남도 평성은 물류 유통 중심지다. 평양에서 북쪽으로 28㎞ 떨어진 교통의 요지로 철도망의 중심이다. 경공업 생산품과 대외 무역 물품이 집산(集散)한다. 전국의 도매상이 생필품 및 식량을 매집하려 평성을 찾는다. 의류 산업도 발달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평양을 보조하는 수도권 도시 구실도 한다. 소득수준이 신의주와 함께 평양 다음으로 높다.

평성은 ‘과학 도시’이기도 하다. 국가과학원 산하 연구기관이 밀집해 있다. 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와 형태가 비슷하다. 평성 은정지구에는 국가과학원이 조성한 19㎢ 규모의 IT 첨단 기술 산업단지도 있다. 평성이과대학은 한손에 꼽히는 명문대로 핵과학자를 비롯한 과학인 양성의 요람이다.

“어른들한테 들은 얘기인데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 북한에서 장사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이 평성의 과학자들이래요. 머리 좋은 일부 과학자들이 장사에 나서 갑부가 됐다고 해요.”

- 고향이 평성이니 집이 부자였겠네요.

“우리 집은 중산층이에요. 평성은 골고루 잘사는 도시입니다. 못사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평균을 내면 북한에서 평양 다음으로 잘삽니다. 남포는 훨씬 못 미치고, 함흥은 평성 사람들이 돈 들고 놀러가는 곳이죠. 평성에서는 신발, 옷도 생산해요. 중국에서 도면을 가져와 만듭니다. 북한에는 저작권 개념이 없어요. 견본을 공장에 갖다 주면 똑같이 만들어냅니다. 엄마가 옷 종류 장사를 도매업, 소매업 전부 다 했어요. 전국에 뿌리기도 하고 장마당에서 팔기도 했죠. 신의주, 혜산에서 중국 제품을 떼와 유통시키기도 했고요.”

수재 중 수재만 모이는 ‘평1고’
평양제1중학교 학생들. [AP=뉴시스]
평양제1중학교 학생들. [AP=뉴시스]

- 아버지는요.

“중학교 교사라고 보도됐던데 실제로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죠. 북한의 중학교는 한국의 중·고등학교를 다 포함해요. 아버지는 평성이과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셨어요. 평성이과대학 수학과에서 교수로 일하시다 현재는 평성제1중학교(한국의 과학고 같은 영재학교다)에서 학생을 가르칩니다.”

북한의 학제는 유치원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으로 이뤄져 있다.

- 서울과학고에서 한국 친구들과 수학 실력을 겨뤘을 텐데 어땠어요.

“엄청 잘하는 애들이 1~2명 있었어요. 나머지는 저와 비슷했고요.”

- 북한에서는 어느 학교 다녔습니까.

“평1고.”

‘평1고’는 평양제1중학교의 고급중학교 과정을 가리킨다. 평양제1중학교는 수재 중 수재만 모인 곳이다.

- 평1고 같은 학교가 북한에 몇 개나 있어요.

“평1고와 등급이 같은 학교는 없어요. 그냥 최고예요. 교육의 질이 다른 영재 학교와는 다르거든요. 평1고가 월등하게 높고 그보다 못한 곳이 도마다 2개 학교가량 있습니다. 평안남도는 인구가 많아 3개 학교가 있고요.”

- 평1고 졸업하면 진로가 어떻게 돼요.

“대부분 김일성종합대에 진학합니다. 김책공대로도 가고요. 잘 못 간 아이들도 명문대인 평성이과대학에 진학해요.”

“분하게도 은메달만 4개”

국제수학올림피아드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19세 이하 청소년을 대상으로 매년 열린다. 이정호 군은 2013년부터 4회 연속 출전했다. 15세 때 처음으로 ‘수학 국가대표’가 된 것이다.

“처음 올림피아드에 갔을 때는 전 세계 출전자 중 나이가 가장 어렸어요. 콜롬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홍콩 대회에서 4년 연속 은메달을 땄습니다. 골드와 실버는 천지차이인데 분하게도 은메달만 4개예요.”

- 평1고와 서울과학고 커리큘럼 중 어떤 쪽이 더 맘에 듭니까.

“글쎄요. 북한의 학교가 더 커요. 전체 합쳐 1000명(서울과학고는 376명)이거든요. 아이들 상태는 서울이 더 좋아요. 상태가 좋다는 건 실력이 좋다는 뜻입니다. 과학에서 차이가 나요. 과학은 실험 장비가 필요한데 평1고는 아무래도 부족하죠. 이론만으로는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어요. 수학은 펜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 과학과는 달라요. 장비가 필요 없는 과목은 북한이 더 우수한 거 같아요. 한국 학생들이 특히 뛰어난 부분은 문제 풀이 방법을 공유하고 인터넷에 올려 전 세계적으로 토론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토론한 내용을 또다시 공유하고요. 북한 학생들은 북한 내부에서만 문제를 풀죠. 세계인과 공유하고 토론하면 실력이 향상될 수밖에 없습니다.”

- 대학은 왜 휴학했어요.

“경제적인 부분은 두 번째예요. 정신적으로 조금 힘들었어요. 적응이란 게 극복하는 과정인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았습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났던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니 괜찮아지더군요. 앞서 말했듯 미국 대학 진학을 생각하다가 쉽지 않다고 결론 내고 한국 대학 입시를 봤습니다. 일단 소속을 가지는 게 좋다고 판단했죠. 입학 후 진로를 바꾸거나 편입할 수도 있으니까요.”

“학생은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해요”

대학교 1학년 1학기 성적이 나빴다. 전공이 아니라 교양에서 탈이 났다. 2학기 중간고사를 치른 후 휴학을 결심했다.

“중간고사를 마치니 2학기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보이더라고요. 문화가 다르니 전공 아닌 과목이 힘들었어요. 학사경고를 3차례 받으면 제적되거든요. 한국 사회에 적응부터 한 후 복학하려고 했죠. 서울대에 진학한 것은 능력이 비슷한 애들끼리 토론하면 수학 실력이 발전한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서울대에 실력이 출중한 애들이 엄청나게 많거든요. 수학과에만 올림피아드에 출전한 친구가 3명입니다. 토론할 기회가 많을 줄 알았는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고요.”

북한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이들은 처음에 한국어가 외국어처럼 들린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영어 단어를 비롯해 북한에서 사용하지 않는 생경한 낱말을 많이 사용해서다.

- 스트레스가 심했나 봅니다.

“학생은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해요. PPT 만들어 발표하는 게 특히 힘들었어요. 언어가 다르니 전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웃으면서 덧붙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 가는 것도 어려웠어요. 집도 엉망이었고요. 집 사진을 찍어놨습니다. ‘나의 한때가 이랬다’고 기억하려고요. 한마디로 ‘아기’였던 거예요. 나이도 실제로 어렸고요.”

- ‘알바’도 해봤어요.

“중학생 몇 명 가르쳐봤어요. 수학을 가르치고 40만 원 받았습니다. 편의점 알바도 알아봤는데 시간이 잘 안 맞더라고요.”

계획 그리고 충동

이정호 군은 최근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인사로부터 장학금이 제공되는 미국 대학 입학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숙고하고 있다.

“원래는 내년 3월 복학하려고 했습니다. 8월 21일부터 석 달간 미국에 연수를 가요. 한국 대학에서도 영어를 많이 쓰거든요. 확실하게 마스터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구사하고 싶어요.”

- 북한에서도 영어 배웠잖아요.

“북한이 수월성 교육 하나는 확실해요. 저 같은 경우는 심지어 혁명역사 수업도 자르고 수학만 파게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잘하면 다른 과목도 가르치는데 더 잘하면 잘하는 것만 시켜요.”

‘김일성 동지 혁명역사’ ‘김정일 동지 혁명역사’는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려면 달달 외워야 한다.

- 그러니까, 공부하러 한국에 온 거죠.

“네~ 공부! 서울과학고 다닐 적엔 편입 왔다고 생각했어요. 평성에서 평양으로 공부하러 간 것처럼 서울로 편입 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런 느낌으로 학교를 다녔고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지금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니까 느낌은 많이 바뀌었죠.”

- 탈북은 충동적? 계획적?

“계획과 충동이 겹쳐 있어요. 어떤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꼭 실행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1년 정도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홍콩이란 장소에 대해서도 ‘안전할까?’ 고민했고요. 중국에서 탈북하는 것은 위험해서 절대로 안 되죠. 그런데 홍콩도 중국이랑 같은 나라잖아요. 충동적인 부분은 ‘성적’입니다. 은메달도 대단하다지만 이 분야에서는 달라요. 골드와 실버는 차이가 있어요. 높은 단계에서는 한 단계 높이는 게 쉽지 않거든요. 실력이 안 돼 골드를 못 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분했습니다. 변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실력과 시험은 다르잖아요. 한국에 가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 북한에서 배워 금메달 못 땄다?

“그런 감정은 아니었어요. 우물 안 개구리라고 생각한 거죠.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자는 충동이었다고나 할까요.”

- 금메달 땄으면 지금 김일성종합대를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국에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 열어둔 상태였어요. 금메달 땄으면 충동이 약해져 가능성이 낮아졌겠죠.”

200달러의 진실

- 고향의 부모님과 연락해요?

“국경 지방과 달리 평성은 휴대전화 통화가 안 돼요. 아버지와 관련된 잘못된 보도가 바로잡혔으면 좋겠어요. 불이익이 갈 수도 있는 사안이거든요. 아빠에게 한국에 가겠다고 말했다면 (아버지가)가지 말라고 했을 겁니다. 완전히 정반대로 언론에 알려진 거죠. 아버지가 탈북 비용으로 줬다는 200달러는 홍콩에서 쓰라고 용돈을 준 겁니다. 외국에 가는 아들에게 ‘살 거 있으면 사’라면서 챙겨준 건데 잘못된 보도 탓에 이상해졌습니다. 잘 키워주시고, 공부 잘하게 만들어주셨는데 그 돈을 아들이 다른 데 쓴 거죠.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수학을 접했습니다. 구구단을 외워야 밖에 나가 놀 수 있었어요. 구구단을 마스터한 후에는 두자릿수 곱하기, 나누기를 가르쳐주셨고요. 아빠에게 연산을 배운 게 제 수학의 시발점이었습니다.”

- 앞으로 어떤 일 하고 싶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 학문적으로 성공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하든 미국에서 공부하든 수학이라는 끈은 절대 놓지 않을 거예요. 진로가 혹여 바뀌더라도 인공지능이나 컴퓨터사이언스처럼 수학을 활용하는 분야가 될 겁니다.”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9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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