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시끄러웠던 1994년 한국 보여준 ’벌새’…세계 25개 영화제 휩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9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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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감독은 첫 장편영화 ‘벌새’로 제 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전 세계 25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엣나인필름 제공
김보라 감독은 첫 장편영화 ‘벌새’로 제 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전 세계 25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엣나인필름 제공
모든 사람들 안에는 작은 우주가 있다. 29일 개봉하는 영화 ‘벌새’는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가 품은 작은 우주에 대한 이야기다. “무게가 30g에 불과한 작은 ”으로 1초에 90번의 날갯짓을 하는 벌새는 남자친구와 가족들, 친구들과의 관계를 고민하며 사랑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은희의 모습과 꼭 닮았다.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공부 잘하는 오빠, 문제아인 언니와 사는 은희. 남자친구와 후배, 친구와의 관계가 위태로울 때 유일하게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것은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다. 은희의 일상에 생긴 작은 균열은 서울 성수대교 붕괴 사건으로 연결된다.

우리 사회의 비극적 사건을 평범한 소녀의 일상을 통해 한편의 서사시처럼 풀어낸 이 작품은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25개 영화제에서 감독상, 심사위원 대상 등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은희네 집인 대치동 은마아파트나 보습학원들, ‘날라리를 색출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선생님, 성수대교 붕괴 등 ‘한국적’ 배경이 가득한 이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각국 심사위원과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19일 만난 김보라 감독(38)은 세계 각국 관객들을 만나면서 이 영화가 가진 보편성의 힘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도 최근 다리가 무너졌고 재난을 많이 겪은 일본 관객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며 고마워했어요. 9·11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생긴 미국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죠.”

유년시절 겪은 관계에 대한 불안, 폭력의 경험 역시 누구나 공감하는 소재였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세계 각국 친구들에게, 60세가 넘은 교수님과 10대들에게도 집요하게 반응을 물어 보편적 공감대가 있다는 걸 확인했어요. 시나리오를 보낸 투자사 담당자가 자신의 유년시절 사건 얘기를 해주신 적도 있었죠. 결국 투자를 받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공감해준다 느꼈을 때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정말 값지다 생각했지요.”

유난히 시끄러웠던 대한민국의 1994년을 오롯이 화면에 옮기기 위해 장소와 소품 섭외에도 공을 들였다. 은마아파트 빈집을 기적적으로 확보했다. 김 감독 부모님 집과 여러 소품실을 전전하며 발견한 액자와 오래된 전집, 베란다의 식물로 은희네 집을 꾸몄다. 은마아파트와 개포동 아파트 상가 등은 재건축을 앞두고 고스란히 남아 있어 1994년의 정취를 스크린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김 감독 개인의 유년시절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4년간 시나리오를 세밀하게 고쳐 쓰는 동안 각색된 부분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건넨 따뜻한 차 한잔처럼 중학교 시절 학원 선생님이 건넨 ‘우롱차’의 기억은 영화에 고스란히 남았다.

아주 보통의 중학생 은희가 겪는 다양한 사건과 감정을 통해 한국사회의 1994년을 그려낸 ‘벌새’는 디테일한 연출과 대사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당신의 ‘1994년’은 어땠나요?’ 엣나인필름 제공
아주 보통의 중학생 은희가 겪는 다양한 사건과 감정을 통해 한국사회의 1994년을 그려낸 ‘벌새’는 디테일한 연출과 대사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당신의 ‘1994년’은 어땠나요?’ 엣나인필름 제공
“어릴 적 한문학원에서 배운 명심보감 명언구가 어린 제 귀에도 들어왔지요. 안경 쓴 선생님이 담담하지만 인간적으로 대해주셨는데 그때 그 우롱차의 느낌이 지금도 따뜻하게 남아있어요. 모든 걸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작은 제스처가 인생에 무늬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은희가 여러 관계의 ‘붕괴’를 겪으며 성장하듯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고 배가 침몰하는 재난을 겪으며 여전히 한국 사회는 성장통을 겪는 중이다.

“서구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열망은 조금 덜었으니 좀 더 건강한 방식으로 우리를 살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했으면 해요. 우리는 너무 많이 달렸고 대단한 성취도 누렸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아팠잖아요.”

이서현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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