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살고 싶어요”[동정민 특파원의 파리 이야기]

백건우-윤정희 파리 인터뷰 마지막편

백건우 윤정희 부부가 지난해 12월, 40년째 살고 있는 파리 외곽 뱅센숲 근처 자신의 집에서 취재진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지난해 12월7일 오후 7시, 인터뷰를 위해 프랑스 파리 외곽 카페에서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만났다.

“저 사람을 아는데 가물가물해. 성당에서 본 사람인가?”

카페 저 편에 앉아있던 한 프랑스 여성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오자 백건우는 윤정희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봉주르, 꼬망 딸레부?(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프랑스 여성이 프랑스어로 친숙하게 안부를 물었다. 윤정희가 웃으며 “트레 비앙(아주 잘 지내요)”이라고 대답하고, 백건우도 “부 잘레 비앙(당신도 잘 지내시죠?)”라고 한바탕 인사를 나눴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이나 길거리를 걸어갈 때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백건우-윤정희 부부에게 자주 인사를 건넸다.

백건우 윤정희 부부가 40년째 살고 있는 집 앞 빵집에 함께 들어가고 있다. 백건우는 매일 아침 이 곳 빵집에서 따끈따끈한 바게트를 산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그도 그럴 것이 이 부부가 이 집으로 이사 온 게 1979년이니 벌써 40년째 이 동네에 살고 있다. 이 부부는 1904년에 지어진 100년도 더 된 다세대 주택 건물에 살고 있다.

“(윤) 바로 옆에 숲도 있고, 명작 삼총사에 나오는 성도 있고, 집 앞의 벚꽃도 아름답지만 이 집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족 같은 이웃 덕분이에요. 한국 같아요. 미리 전화도 하지 않고 먹어보라고 음식을 갖고 내려오죠. 처음에는 다들 갓난 애기들을 키웠는데 이제 그 애들이 커서 자기 애들을 데려올 정도로 시간이 흘렀네요. 제 딸 진희(1976년생)도 여기서 컸죠.”

윤정희는 “서로를 집으로 자주 초대해 파티를 여는데 저는 전식으로 잡채, 본식으로 불고기를 내놓는다”고도 했다. 1974년에 만나 45년 째 파리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에 한국은 늘 그리운 고향이다.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프랑스 파리 집에 김수환 추기경이 들렀을 때 모습. 이들 부부는 모두 가톨릭 신자다. 백건우와 윤정희의 세례명은 각각 조셉마리와 소화데레사이다.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백건우-윤정희 부부는 매년 한 두 차례는 반드시 한국에 들어간다. 백건우는 특히 거의 매년 지방 공연을 하고 있다. 올해도 이번 달 인도 공연을 마친 뒤 4월부터 거의 두 달 간 한국 지방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매년 지방 공연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에요.

(백) “1993년에 처음 대규모 지방 공연을 시작했어요. 한국에서 10년 정도 연주하다보니 늘 큰 도시 한 두 군데서만 하더라고요. 음악을 즐기는 건 모든 사람의 권리잖아요.”

-지방은 공연 시설이 열악할 텐데요.

“첫 전주 공연을 잊을 수가 없어요. 공연장이 없으니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했어요. 극장 바로 앞에 해장국 가게가 있는 재래시장이었어요. 제가 전주에 도착해서 제일 좋은 피아노를 어디서 빌릴 수 있냐고 물었더니 한 피아노 학원에 있대요. 극장까지 바퀴가 가운데 하나 달린 구루마(리어카)에 피아노를 통째로 올려놓고 운반 했어요. 원래는 피아노 다리와 페달 떼고 몸통만 상자에 넣어서 이동하는데 그럴 겨를도 없었죠. 그렇게 극장 무대 위로 피아노를 올리다가 바퀴가 부러져 버렸어요. 제가 피아노 바퀴 자리에 식탁 흔들릴 때처럼 뭔가를 끼워 넣고 위를 보니 조명이 없어요. 앞에 있는 시장 철물점에 가서 철판을 세 개 샀죠. 돌돌 동그랗게 말아서 그 속에 등을 넣어 제가 조명을 만들어 공연을 했어요.”

-그렇게 벌써 25년째 지방 공연을 하고 있네요.

“경북 안동에서 음악회가 끝났는데 한 어머님이 이 쪽(윤정희)에게 와서 울어요. 자기 딸이 피아노 공부하는데 음악회 들으려면 늘 서울에 가야 하는데 공연 표 사고 하룻밤 자고 할 돈이 없었다고. 여기까지 찾아와줘서 고맙다고요. 그게 보람이에요. 지방 많은 음악회를 개런티 없이 해요. 한 번은 서울하고 같은 공연 가격을 받기에 주최자에게 화를 낸 적도 있어요. 지방분들에게 그런 경제적 부담을 갖게 하면 안 되죠.”

지방 공연은 이제는 백건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섬 음악회’로 이어졌다.

“섬에서 공연 보러 뭍으로 나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상징적으로 문화는 누구든지 접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섬 음악회를 기획했어요. 그런데 악기 운반하고 돈이 많이 들거든요. 너무 하고 싶어 연습실에 대형 한국 지도를 그려놓고 혼자서 여기 가면 좋겠다고 하고 섬에 동그라미를 쳐 보기도 했죠. 우연히 MBC 사장과 연결돼 할 수 있게 됐어요.”

외국에서 나홀로 배고픔과 외로움에 힘들게 음악 했던 백건우는 전 세계에서 맹활약 중인 피아니스트 후배들만 생각하면 뿌듯하다.

“미국 출신의 한 이탈리아 친구가 콩쿠르 심사를 하고 난 뒤 연락이 왔어요. ‘건우야, 어떻게 된 거냐. 콩쿠르 1등부터 5등까지 모두 한국인이야’라고요. 차이코프스키나 엘리자베스 콩쿠르 정도 빼고는 대부분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이 1위를 한 것 같아요. 현악기, 성악가에 이어 피아니스트도 두각을 보이고 있죠.”

백건우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인들의 음악적 퍼포먼스가 뛰어난 이유를 물으면 “한국민 모두가 음악적인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보세요. 1980년도 쯤 부모님이 계시던 부산 동래 온천 갔어요. 그 뒤에 동산이 있거든요. 이 사람(윤정희)과 함께 산책하는데 노래 소리가 들려요. 가서 봤더니 아낙네 스무 명 가량이 둘러앉아서 노래로 대화를 해요. 남편이 또 술 먹고 늦게 왔다 뭐 이런 내용인데 그걸 즉흥적으로 노래로 하더라고요. 부산역에 가보니 노인들이 노래 부르며 춤을 추고 있고 거지가 손을 내밀고 타령으로 구걸을 해요. 우리나라는 장례식도 전부 노래로 하잖아요.”

백건우가 한국에서 법정 스님 만났을 때 모습. 윤정희가 찍어준 사진이다.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백건우는 언론 인터뷰를 할 때 대답하기 싫어하는 질문이 몇 개 있다.

‘이번 공연이나 음반은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고 들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첫 번째다.

그는 “음악은 말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들으면 되죠. 음악을 듣는 방법이 뭐 있나요. 제가 가이드라인을 주는 게 말이 안 되죠.”라고 말했다.

1970, 80년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다 1990년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러시아, 중국에서 주로 활동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제가 이 생활을 계속 하는 건 음악은 모든 사람과 대화할 수 있고 또 설득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 때문이에요. 저는 음악을 종교같이 믿어요. 한 때 중국 관객은 태도가 안 좋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웬걸요. 얼마나 훌륭한데요.”

연장선상에서 자신을 ‘건반위의 구도자’로 표현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한 언론 기자가 ‘구도자’라는 표현을 처음에 썼는데, 어떤 일이든 일생 동안 그 일에 종사는 사람은 누구나 구도자죠. 저만 특별한 게 아니에요. 일생 동안 음악을 종교처럼 믿고 했을 뿐이에요.”

모든 음악가는 각자의 소리가 있다고 믿는 백건우는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는 질문도 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자기 소리가 있어요. 타고난 자기의 독특한 음악적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그냥 건반 누르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아요. 자기만의 메시지가 없는 거죠. 콩쿠르 심사를 가 보면 수십 명이 같은 곡을 치잖아요. 그런데 같은 피아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소리가 달라요. 그냥 건반을 치는 이도 있고 자기의 소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도 있죠.”

-칠십 평생 연주를 해도 연주 전에 여전히 긴장되나요.

“그럼요. 그런데 긴장의 종류가 다르죠. 젊었을 때는 한 음만 틀려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이제는 정확히 치는 것보다 곡이 살아있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죠. 곡 도 삶과 죽음과 같아요. 음에 생명체가 있어요. 그러니 연주가 창작이라고 할 수 있죠.”

기자는 백건우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궁금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자기만의 소리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곡에 대한 성실하고 진실된 접근이 필요해요. 대중에게 환영받는 곡만 골라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먼저 깨닫고 그걸 관중에게 들려줘야 해요. 아는 것과 깨닫는 건 천지차이죠. 깨닫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콩쿠르에서 상 받았을 때 빨리 그거 앞세워서 돈 벌어야겠다 이런 마음은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친한 친구가 프로방스 뤼베홍(Luberon)에 간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찍어준 사진.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 에필로그 ▼

지난달 29일, 파리의 한 식당에서 만난 백건우는 왠지 쓸쓸하고 낯설어 보였다.

백건우는 지난달 16일부터 혼자 스페인 빌바오와 팜플로냐 연주를 다녀왔다. 백건우는 “결혼 후 43년 동안 혼자서 연주를 다녀온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 장례식 참석을 위해 귀국한 윤정희는 지병 치료차 당분간 한국에 머물 예정이다. 두 사람은 43년 동안 남미 카자흐스탄 타히티까지 전 세계 연주 여행을 늘 함께 다녔다.

지난달 백건우가 스페인 빌바오에 연주를 하러 갔을 때 찍은 빌바오의 상징 구겐하임 미술관. 윤정희가 한국에 머물면서 홀로 연주 공연을 온 백건우의 사진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있다.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절친·Best-Friend Forever)로 살아가는 커플 이야기를 다루는 동아일보 절친 시리즈를 위해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네 차례 만났다. 인터뷰 시간만 13시간에 이른다. 이들 부부는 “둘이 함께 이렇게 오랫동안 자세한 인터뷰를 한 건 평생 처음”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휴대전화도 함께 쓰고, 머리도 남편이 잘라준다는 노부부의 삶이 궁금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국 최고 유명 부부가 프랑스 파리에서 평생 살고 있는 이유도 궁금했다.

“전 세계적으로 연주 다니기에 한국은 너무 먼 곳”이라는 백건우의 설명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파리는 로맨틱하잖아요”라고 말하는 윤정희의 철없는 설명이 더 와 닿았다.

그래서 두 사람과 함께 45년 전 연애를 했던 추억의 장소를 함께 가보자고 제안했다. 몰래 단 둘이 동거했던 몽마르트 언덕 밑 옥탑방, 두 사람이 우연히 처음 만난 팡테옹 옆 허름한 중국 식당, 세느강변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던 예술의 다리(퐁데자르) 등을 동행하며 지켜본 두 사람은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는 프랑스 노부부와 똑 닮아 있었다.

파리에서는 빨간색 바지를 입은 할아버지와 하이힐을 신은 할머니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며 낮에 함께 카페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게 일상이다. 그렇게 백건우-윤정희 부부는 걸어 다닐 때 손을 잡거나 어깨와 허리를 두르며 함께 발을 내딛었고 추우면 길에서도 꼭 안았다.

“근데 세느강 강변 건물에 왜 이렇게 대형 광고가 많아” “요즘 파리에 옷 살 가게가 없어. 파리 패션도 다 편한 것만 추구하고 개성이 사라졌어”라며 투덜대는 맞장구도 찰떡궁합이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가 40년째 살고 있는 집 앞 골목을 함께 손을 꼭 잡고 걸어오는 모습. 파리에서 이들 부부는 늘 손을 잡거나 어깨와 허리를 서로 두른 채 걸어다녔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최고의 피아니스트와 여배우지만 대중의 인기보다는 내 만족이 우선인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도 비슷했다.

백건우는 “인기를 올리겠다는 건 예술가의 길이 아니죠. 그건 ‘쟁이’ 들이 하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윤정희도 “저는 그저 영화를 좋아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그게 제 꿈이니까요”라고 말했다.

‘관객들이 어떤 피아니스트나 배우로 기억해주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도 두 사람의 대답은 싱거웠다. “저는 그런 생각 안 해요. 그냥 진실한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백건우) “저도 같아요. 다른 거 없어요. 그냥 하늘나라 갈 때까지 연기하고 싶어요”(윤정희) 그들의 대답이었다.

인생관을 묻자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답은 간단했다.

“아름답게 살고 싶어요.”

파리=동정민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