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주민들 김일성땐 땅치며 통곡… 이번엔 비교적 차분한 모습”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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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김일성 사망당시 김일성大 다녔던 주성하 기자가 그때와 비교해보니

오히려 기자가 깜짝 놀랐다. “뭐지. 평양의 저 모습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한국에 최초로 전해진 평양의 모습은 기자가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외신들이 보내온 영상 속의 평양은 상상 외로 평온했다.

배낭을 메고 가는 여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는 남성, 카메라를 힐끗힐끗 돌아보며 가는 사람…. 평양역 앞에는 여느 때처럼 차량들이 오갔고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빼곡했다. 평양에 지국을 두고 있는 일본 교도통신도 “평양시내는 조용하고 평온했다”고 전했다. 평양이 이 정도니 지방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상당수 북한 노동자도 오후 4시까지 근무시간을 채우고 퇴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이 발표됐던 1994년 7월 9일 기자는 평양에 있었다. 그날의 모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특별방송’을 청취하기 위해 기관별로 모였던 군중은 김 주석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그 자리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김일성 동상 앞에서 울리는 통곡소리는 평양 시내를 온통 흔들었다.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울음이었다.

당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큰 사건 앞에 북한 주민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애도를 표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민족의 전통적인 제사 절차대로 집에서 닭을 잡아 제사상을 준비해 김일성 동상 앞에서 술을 따르며 우는 사람도 많았다.

위에서 하달되는 지시도 북한 지도부의 당황스러움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제사상도 허용했고 술도 마시지 말라는 지시가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하듯 슬프다고 저녁에 술을 마셨던 사람들은 뒤늦게 불경죄로 처벌을 받았다.

동상 주변에 빙 둘러서 자발적으로 묵념하는 이른바 ‘호상’도 김일성종합대에서 시작된 것을 보고 전국에 따라 배우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영정 사진도 며칠 뒤에는 웃는 사진으로 바뀌었고, 추도가도 전통적인 노래 대신 ‘빨치산 추도가’로 바뀌었다. 이런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대다수 주민은 진심으로 애달파했다.

그런데 이번엔 확실히 분위기가 그때와 전혀 달랐다. 19일 오후 북한 매체를 통해 눈물을 흘리는 북한 간부들의 모습과 만수대 김일성 동상 앞에서 조의를 표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방영됐다. 간부들의 모습에선 카메라를 의식한 가식마저 느껴졌다.

거리에서 중국중앙(CC)TV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댄 보안원과 여성은 진심으로 슬퍼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만수대 동상 앞에선 한두 명만 무릎을 꿇고 통곡하고 대다수는 서서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1994년 모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 장소였다. 더구나 앞줄이 아닌 카메라에서 멀리 잡힌 사람들 중엔 무표정한 얼굴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1994년 몇 달 동안 평양에서 조문행사를 경험한 만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기자는 적어도 평양에서만은 대성통곡할 줄 알았다. 국가안전보위부가 여전히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물론 여기에는 1994년과 2011년의 다른 상황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북한에는 전국 곳곳에 김일성 동상이 있는 대신 일반에 공개된 김정일 동상은 없다. 마땅히 가서 울 만한 곳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북한 주민들은 만수대 김일성 동상을 찾았다. 하지만 김정일 사망에 김일성 동상 앞에서 운다는 것이 어색할 법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한겨울이다. 설사 아무리 애통하다 해도 영하의 기온에 오랫동안 떨 수는 없다.

탈북자들은 1994년 7월을 떠올리면 매일 아침 동상 앞에 놓을 꽃을 마련하기 위해 산과 들을 헤매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꽃송이 수로 충성심이 평가되던 때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헤매도 꺾어 올 꽃이 없다. 조화가 이를 대신할지는 모르겠다.

물론 20일부터는 통곡의 강도가 커질 것이다. 애도 행사가 각 조직과 단위별로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모여서 통곡하면 곡소리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미 김일성 상을 치러본 경험이 있기에 주민들의 시행착오도 적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장례 의례가 잘 짜여 정교하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추모 요건은 노동당의 지시가 내려오기 전에 흘리는 눈물이어야 했다. 그러나 외신들이 본 평양의 초기 모습은 조용하고 평온했다.

북한 당국은 지방 도시들에 군인을 풀어 장마당을 폐쇄한 뒤 주민 동향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주민은 그동안 의존해오던 시장이 폐쇄돼 쌀값이 오를까 봐 더 걱정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향후 김정은의 통치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례다.

김 위원장은 김 주석 사망 후 ‘선군정치’를 표방하면서 군에 의지한 통치로 위기를 돌파했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정식 데뷔하기 전부터 보위부 장악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북한은 당면한 위기를 정교한 감시망에 기초한 ‘정보감시통치’로 극복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주민들도 지금 같은 시기에 사소한 잘못이라도 할 경우 가혹한 처벌이 뒤따를 것을 의식해 최대한 몸을 사리고 눈치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면 김정일 애도기간이 끝날 올해 말까지도 북한은 매우 평온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진짜 고비는 북한이 강성대국을 달성하겠다고 공언하던 내년에 찾아올 것으로 보인다. 이제부터 국정 실패에 대한 모든 비난의 화살은 김정은에게 쏠릴 것이다. ‘젊은 김정은이 과연 정권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까. 김정은 통치 아래 나의 삶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지금 북한 주민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 질문이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 대답에 북한 주민들의 운명과 한반도의 명운이 걸려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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