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도 못연 주민투표]‘215만명의 선택’ 창고 직행… 與도 野도 ‘민의’ 아전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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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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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후 정국 소용돌이

열지도 못한 투표함 24일 치러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율이 33.3%를 넘지 못해 215만7744표가 담긴 투표함은 열리지도 못했다. 종로구 선거관리위원회 관할 투표함이 종로구청 개표 장소에 봉인된 채 쌓여 있는 모습.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열지도 못한 투표함 24일 치러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율이 33.3%를 넘지 못해 215만7744표가 담긴 투표함은 열리지도 못했다. 종로구 선거관리위원회 관할 투표함이 종로구청 개표 장소에 봉인된 채 쌓여 있는 모습.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서울시장직을 건 ‘오세훈의 모험’은 예상대로 ‘한여름 밤의 꿈’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여야, 보수와 진보, 선택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의 정면승부는 이제부터 시작됐다.

이번 주민투표는 복지 포퓰리즘 논란 속에서 가치와 이념 대결로 치달았다. 오 시장이 무상급식 지원 범위라는 정책 이슈에 시장직까지 연계하면서 이번 주민투표가 정책투표에서 오 시장에 대한 신임투표로 변질된 측면도 있다.

일각에선 이명박 대통령의 청계천 개발을 벤치마킹한 듯한 광화문광장 조성과 ‘세빛둥둥섬’ 등 서울 디자인 사업을 벌여온 오 시장 개인의 시정 운영 방식에 대한 호불호가 이번 주민투표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어쨌든 결과는 ‘무상시리즈’를 내놓고 있는 야권의 승리이자 보편적 복지의 승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주민투표는 야권의 투표 거부 운동으로 왜곡된 측면도 있다. 215만 명의 서울시민이 투표소에 나갔지만 투표함은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어두운 창고로 직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 시장과 여권은 분명히 패배했지만 야권과 진보 진영의 ‘분명한 승리’로 보기도 애매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번 결과를 놓고 서울시민이 야권의 무상복지 시리즈와 보편적 복지 모델을 지지하고 나섰다고 볼 수 있는지, 아니면 33.3% 이상의 투표율을 기록해야 투표함을 열 수 있도록 한 주민투표제도의 맹점이 초래한 ‘민의 왜곡’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 수 있는 대목이다.

여야는 이번 주민투표 결과를 놓고 각자 유리한 해석을 내놓으며 향후 전면전을 예고하고 있다. 복지 논쟁에서 일단 우세를 점한 민주당 등 야권은 이 기세를 내년 총선, 대선까지 이어가려 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복지 이슈는 이제 ‘대세’가 됐다. 민주당이 준비한 ‘무상 시리즈’를 전면에 내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향후 복지정책의 방향을 놓고 치열한 내부 논쟁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무상 복지=포퓰리즘’이라는 보수 프레임을 그대로 유지할지, 아니면 전면적인 노선 전환을 모색할지 주목된다. 주민투표를 줄곧 반대해 온 정두언 여의도연구소장은 “이제부터 한나라당과 여권의 복지정책을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번 주민투표로 오 시장이 시장직에서 물러나고 보궐선거로 새 시장을 뽑아야 하는 만큼 내년 총선과 대선 판 자체가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 악화된 민심으로 내년 총선 ‘포비아’(공포)에 떨고 있던 한나라당 서울지역 의원들은 총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서울시장을 야권에 뺏길 경우 낙선 공포가 더욱 현실화될 수 있다며 걱정하는 모습이다. 민주당 등 야권은 이번 기회에 2002년 이후 한나라당에 내줬던 서울시를 되찾고 내년 총선에서 서울을 장악할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더 나아가 ‘박근혜 대세론’으로 진행되던 내년 대선 레이스에도 지금과는 다른 충격파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주민투표 정국에서 내내 적극적이지 않았던 박 전 한나라당 대표도 당초 올해 말이나 내년 초로 예상했던 대선 주자로서의 본격 활동 시점을 앞당길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이번 주민투표로 야권의 대공세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지금처럼 애매한 스탠스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 전 대표라는 ‘여권 구원투수’의 등판 시기가 당겨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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