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4>끊이지 않은 탄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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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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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王 상징물 참배강요에 “우상 숭배” 비판… 108일 무기정간

창간이후 무기정간만 4차례
판매금지 63회 - 압수 489회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시켜
광복뒤인 1945년 12월 1일 복간

일제 총독부는 1919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사를 짓고 조선인들에게 일왕 숭배를 강요했다. 일왕가를 상징하는 거울 구슬 칼 등 3종의 신기(神器)를 신사에 두고 절을 하게 했다. 동아일보가 1920년 9월 25일자 사설에서 이를 꼬집었다.

“경(鏡)으로 혹은 주옥(珠玉)으로, 혹은 검(劍)으로, 기타 하등 모양으로든지 물형(物形)을 작하야 혹처(或處)에 봉치(奉置)하고 신(神)이 자(玆)에 재(在)하며 혹 영(靈)이 자(玆)에 재(在)하다 하야 이에 대하여 숭배하며, 혹 기도함은 우상의 숭배라 할 것이다.”

이 사설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조상 숭배를 미신으로 몰고 단속하는 데 대한 반론으로 일왕가의 상징물을 우상 숭배로 비판한 것이다.

일제 당국은 이 사설이 나간 당일 동아일보에 첫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고, 정간은 이듬해 1월 10일까지 108일간 이어졌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뒤 반년도 안 돼 당한 무기정간 조치로 동아일보는 타격을 입었다. 재정이 악화돼 인쇄공 상당수가 회사를 떠났고, 어렵게 마련한 지방의 지국망들도 흔들렸다. 정간은 석 달 반 만에 풀렸지만 곧장 신문을 발행할 여건이 못돼 다시 신문을 내기까지 한 달 열흘이 더 걸렸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1921년 2월 21일 속간(續刊)호에서 일제의 탄압에 한 치의 뜻도 굽히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천명했다.

“우리가 어찌 홀로 탄탄하길 바라며 안이한 걸음을 바랐으리오. 본보의 주지(主旨)에 어찌 일 점 변경이 있을 수 있으리오.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지지하는 본보의 주지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을 것임을 천명하노라.”

속간 이후 동아일보는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가 토산품(국산품) 애용 운동인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하자 이를 상세히 보도했으며,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 추진을 위해 1923년 3월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민립대학 기성회’가 창립되자 발기인 전체 명단을 게재해 적극적으로 이를 알렸다. 1924년 10월 4일에는 회사 정관에 ‘주주는 조선인에 한한다’는 조항을 삽입하며 민족 언론의 길을 거듭 다짐했다.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동아일보는 창간 후 사회 공론의 장이 됐으며 일제에 대한 비판 기능도 충실히 해나갔다.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등을 추진한 것도 문화운동을 넘어선 정치적 항거였다”고 말했다.

일제는 1926년 3월 6일 2차 무기정간을 내려 다시 동아일보 탄압에 들어갔다. 소련의 국제농민본부가 보내온 3·1운동 7주년 기념 메시지를 실었다는 게 이유였다. 송진우 주필과 김철중 편집인 겸 발행인이 각각 보안법과 신문지법 위반으로 기소돼 징역 6개월과 금고 4개월의 판결을 받았다.

1930년 4월 16일엔 미국 ‘네이션’의 빌라즈 주필이 보낸 창간 10주년 기념사 게재건으로 3차 무기정간을 받아 138일간 발행이 금지됐다. 1936년 8월 25일엔 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해 게재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현진건 사회부장 등이 구속됐고 4차 무기정간을 당했다. 9개월여가 지난 1937년 6월 3일에야 속간됐다.

네 차례 무기정간 외에 판매금지와 압수도 빈번했다. 1920년 4월 15일자의 ‘평양에서 만세소요’라는 제목으로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상세히 전했다가 첫 판매금지 및 압수 조치를 받았다. 이후 폐간 때까지 20년 동안 판매금지는 63회, 압수는 489회에 이르렀다. 기사가 삭제된 것은 2434회나 됐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국내 언론에 대한 통제 수위를 한층 높였다. 일제는 1938년 도(道) 경찰부장 회의에서 “전시체제 아래 언론기관의 국가적 책무가 무거운 이유를 설명하고 지도단속에 만전을 기하라”며, 1939년 회의에서는 “성전(聖戰)의 목적 달성에 매진하는 실상을 내외에 선전토록 할 것”이라며 언론 통제의 고삐를 죄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인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에 착수했다. 1939년 11월 조선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강압적으로 따르게 하는 ‘창씨개명’도 실시했다.

일제 총독부는 11월 하순부터 동아일보의 자진 폐간을 종용했다. 1940년 6월 초엔 “신문지 파지를 식당에서 구입했다”며 트집을 잡아 ‘(전시) 배급물자 불법처분’의 구실로 경리장부를 압수하고 김동섭 당시 경리부장을 구속했다. 폐간 구실을 찾던 일제는 동아일보가 송진우 고문 명의로 수만 원을 은행에 저금했고, 보성전문에 유휴자금 2만 원을 빌려주고 있는 점을 들어 당시 임정엽 상무와 국태일 영업국장을 구속했다. 예금은 사옥 신축 기금이었고 대여금은 이자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될 사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제는 대여금을 문제 삼아 김성수 보성전문 교장을 배임횡령으로 몰아 그해 7월 중순부터 경찰에서 연일 심문했다. 송진우 명의의 예금은 독립운동 자금이었다는 혐의를 만들어 백관수 사장 이하 간부를 대거 구속했다.

종로경찰서 사찰과장실에 수감된 동아일보 중역들은 강제로 폐간계 제출을 강요받았지만 백 사장은 이를 거부했다. 일제는 발행인 겸 편집인 명의를 중병을 앓던 임 상무로 변경하도록 강요한 뒤 임 상무 명의로 폐간계를 내게 만들어 눈엣가시 같았던 동아일보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로써 동아일보는 창간 20년 만인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됐다.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11일자에 실은 폐간사에서 “한번 뿌려진 씨앗인지라 오늘 이후에도 싹 밑엔 또 새싹이 트고 꽃 위엔 또 새 꽃이 필 것을 의심치 않는 바이다”라며 굽히지 않는 언론의 정도를 이어갈 의지를 밝혔다. 동아일보는 5년 뒤인 1945년 12월 1일 복간돼 해방 조국에서 이 약속을 지켰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손기정 일장기’ 지워 줄줄이 연행▼

사장-주필 사직… ‘신동아’ 폐간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손기정 선수의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식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한 손기정 선수의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식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聖戰(성전)의 最高峯征服(최고봉정복) 待望(대망)의 올림픽마라손 世界(세계)의 視聽(시청) 集中裏(집중리) 堂堂(당당) 孫基禎君優勝(손기정군우승), 南君(남군)도 三着堂堂入賞(삼착당당입상)’(1936년 8월 10일자 동아일보 호외)

1936년 8월 9일, 오후 11시(한국 시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이 시작됐다. 이튿날인 10일 새벽 2시간29분19초2의 기록으로 손기정 선수가 1위로 골인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동아일보는 호외로 쾌거를 알렸다. 또 동아일보는 ‘올림픽 세계 제패의 노래’를 공모했고 대회 기록 영화를 입수해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에서 9차례 공개 상영하며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다.

보름이 지난 8월 25일자 동아일보 석간 2면에는 월계관을 쓰고 수상대에 오른 손 선수의 사진이 실렸다. 일본 주간지 ‘아사히 스포츠’에 실린 사진을 복사해 실은 것이지만 손 선수의 가슴 부위에 있던 일장기는 지워져 있었다. 당시 체육부 이길용 기자와 이상범 화백이 주도한 일장기 말소였다.

26일 부임한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은 이를 보고 29일자로 동아일보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다. 이 기자와 이 화백을 비롯해 현진건 사회부장과 신낙균 사진과장, 백운선 서영호 기자, 편집자 장용서 임병철 기자가 연행됐다. 같은 사진을 월간지 신동아에 게재한 최승만 잡지부장과 잡지 사진부의 송덕수도 연행됐다. 이 중 이길용 이상범 백운선 서영호 신낙균 장용서 현진건 최승만 등 8명은 40일간 구속됐고 이길용 현진건 최승만 신낙균 서영호 5명은 일제 강압에 의해 ‘언론기관에는 일절 참여하지 못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고 동아일보를 떠나야 했다.

그해 말까지 동아일보사 송진우 사장과 장덕수 부사장, 김준연 주필, 설의식 편집국장도 신문사를 떠났고 인촌 김성수는 소유 주식을 모두 내놓아야 했다. 신동아와 신가정 등 동아일보에서 내던 두 잡지는 강제 폐간됐다.

광복 이후 1945년 12월 1일자로 동아일보가 중간(重刊)되면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퇴직했던 사람 중 희망자는 모두 복직했다. 이길용 기자는 사업부장으로, 백운선 사진반원은 사진부장으로 복직해 활동하다 6·25전쟁 때 납북됐고 설의식 편집국장은 주간 및 편집인으로, 장덕수 김준연은 1947년 2월 이사로 복직했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총독은 뱀의 혀로 조선인을 기만치 말라”▼

■ 東亞에 실렸던 항일 표현들


일제 총독부가 1920년 9월 25일 동아일보의 첫 무기정간을 결정하며 내린 신문 발행정지서. 이날 동아일보가 일왕가의 ‘신기’에
 대한 숭배 강요를 비판하자 총독부는 당일 즉시 신문발행을 정지시켰다. 창간 후 반년도 안돼 당한 무기정간으로 동아일보는 타격을 
입었으나 1921년 2월 21일 속간호 사설에서 “본보의 주지(主旨)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을 것”이라고 밝히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제 총독부가 1920년 9월 25일 동아일보의 첫 무기정간을 결정하며 내린 신문 발행정지서. 이날 동아일보가 일왕가의 ‘신기’에 대한 숭배 강요를 비판하자 총독부는 당일 즉시 신문발행을 정지시켰다. 창간 후 반년도 안돼 당한 무기정간으로 동아일보는 타격을 입었으나 1921년 2월 21일 속간호 사설에서 “본보의 주지(主旨)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을 것”이라고 밝히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재등 총독이여, 당국 제공(諸公)이여, 그 태도와 정책을 명백히 하고 가식과 허위로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선정덕정(善政德政)이니 하는 사(蛇)의 설(舌)을 농(弄)하야 조선인을 기만치 말지어다.”

1920년 7월 22일 동아일보 1면 사설 일부다. 나흘 전 일본 경찰이 경성(서울) 단성사에서 열린 일본동경유학생 학우회 주최 순회강연을 중단시키고 해산시킨 것을 비판한 사설이다.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실명을 거론하며 ‘뱀의 혀를 놀리지 말라’고 썼다. 일제강점기 때 사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인 항일표현이다.

창간 직후인 1920년 4월 9일 1면 기명 논설에선 이 같은 강력한 항일논조의 씨앗이 보인다. 추송(秋松)이란 필명으로 발표된 이 논설은 “조선인의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은 조선인의 혈액과 뇌수(腦髓)에 의하야 발생하는 자(者)”라며 “여하(如何)히 선각자와 유식자를 억압 취체(取締)할지라도 조선혼(朝鮮魂)과 독립사상은 추호도 타격을 수(受)할 바이 무(無)하리로다”라고 천명했다.

1922년 2월 7일 ‘전제정치를 타파하라’는 1면 사설도 이에 못잖다. “조선인이 실로 행복을 기망(企望)하고 발달을 요구할진대…그 전제제도를 타파함이 가(可)하도다”라고 일제 통치를 정면 비판했다.

1922년 9월 16일 2면 ‘횡설수설(橫說竪說)’난은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의 논문을 인용해 “일선(日鮮)융화는 역사상으로 보아 도저히 불가능한 바”라며 “민족자결주의는 세계의 대세가 되야 애란(愛蘭·아일랜드)이 자유국이 되고 애급(埃及·이집트)이 보호령의 기반(羈絆·굴레)을 탈(脫)한 금일에 조선을 독립케 함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일본의 장래를 위하야 이익”이라고 과감히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

서슬 퍼런 일경을 향해 “저능하다”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1926년 7월 21일 1면 사설은 세계평화와 인류의 자유 증진을 내세운 아세아민족회의의 일본 나가사키 개최를 허용하면서 정작 조선인의 관련 집회를 금지한 일본 당국을 비판했다. 사설은 “경찰 행정이 저능이요 몰상식”이라며 “그 추잡한 권력자 등의 궤책(詭策·간사한 책략)에 붓을 더하고저 아니 한다”고 질타했다.

일제의 빈번한 집회금지를 비판한 1927년 10월 25일 1면 사설은 세간의 말을 간접 인용하는 방식으로 일제의 실정을 우회 비판했다. “조선 사람은 하등의 자유가 업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먹을 것 업시 방황하는 중이다. 이와 가튼 현상에 잇서서는 차라리 감옥 생활하는 것이 나흘 것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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