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진면목은 題跋속에 숨었나니…

  • 입력 2007년 10월 3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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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寒圖 藕船 是賞 阮堂(세한도 우선 시상 완당).’

‘차가운 세월을 그린 그림. 우선(이상적의 호), 감상해 보게나. 완당(김정희의 호)이.’

1844년 59세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유배지 제주에서 자신을 잊지 않고 책을 보내 주는 역관인 제자 이상적을 위해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를 그렸다. 추사는 그림 오른쪽 위에 작품 이름을 적었고 그림 왼쪽엔 제작 동기와 작품의 의미를 담은 발문을 적어 넣었다.

‘세한도’에서 추사의 글 그림 이외에 눈여겨봐야 할 것은 추사의 발문 왼쪽에 잇대어 붙어 있는 제발(題跋·발문)이다. 이 그림을 감상한 20명의 품평이나 감상을 적은 글이다. ‘세한도’는 그림 부분 길이가 103cm인데 제발은 무려 11m가 넘는다.

제자 이상적은 이 그림을 들고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서 중국인 친구 오찬(吳贊)이 베푼 축하연에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작품을 보여준 뒤 17명의 제발을 받았다. 이상적은 이 제발을 한데 넣어 한 축의 두루마리로 만들었다. 그림의 오른쪽엔 김준학이 쓴 ‘완당 세한도’라는 큼지막한 글씨를 추가해 표지처럼 꾸몄다.

1949년엔 당시 이 그림의 소장자가 독립운동가이자 서화비평가였던 오세창,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였던 위당 정인보에게 그림을 보여 주고 감상문을 받아 두루마리에 이어 붙였다.

이렇게 해서 총 20명의 제발은 이제 ‘세한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 제발까지 함께 읽어야만 ‘세한도’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다.

‘세한도’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옛 그림이 모두 그렇다. 때마침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기획전 ‘조선 그림 제대로 읽기-그림 속의 글’이 열리고 있다.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秋聲賦圖), 조희룡의 산수죽석도(山水竹石圖), 민영익의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 허련의 홍백매도(紅白梅圖) 병풍 등 글이 있는 조선시대 그림 40여 점을 전시한다.

제발에는 화가의 내면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화가 개인과 얽힌 시대상 문화상까지 숨겨져 있어 역사 해석에도 적잖은 도움을 준다.

단원의 1805년작 ‘추성부도’의 제발을 보면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에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 인적이 없는데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난다’라는 대목이 있다. 단원이 직접 쓴 이 글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이 제발이 있어 작품의 가을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된다.

‘세한도’의 경우처럼 감상자의 품평을 적어 놓은 제발도 흥미롭다. 민영익이 20세기 초에 그린 ‘노근묵란도’(뿌리가 드러난 난초 그림)는 오세창, 당시 대표 화가였던 안중식과 이도영, 독립운동가였다가 친일파로 전락한 최린의 제발로 화면이 가득하다. 하지만 제발은 번잡하지 않고 오히려 화면 속 난초와 잘 어울린다. 옛 사람들의 제발은 그렇게 그림 자체가 되었다. 그림 속 제발의 또 다른 매력이다. 전시는 내년 3월 2일까지. 월요일 휴관. 031-320-1811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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