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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고물이 온다, 고물이 간다”

입력 2022-04-14 03:00업데이트 2022-04-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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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심야 열병식에서 트랙터들이 122mm 방사포를 견인해 주석단 앞을 지나가고 있다. 동아일보 DB
주성하 기자
몇 년 전 유튜브에서 북한군 열병식 풍자 영상이 화제가 됐다. 다리를 75도 이상 올리며 껑충껑충 뛰어가듯 행진하는 북한군 영상에 팝 음악 밴드인 ‘비지스’의 노래를 입혔을 뿐인데 조회수가 4200만 회가 넘었다. 여기엔 10만 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북한의 최대 명절인 태양절 110주년인 내일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이 또 열린다. 이젠 하도 많이 봐서 대략적인 흐름이 머리에 훤하다. 선두가 기마병이든 노병이든 약간의 차별화는 있겠지만 보병 행진 후 기계화 부대가 따르고, 공군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가운데 대륙간탄도미사일이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순서는 변함이 없다. 화려한 옷을 입고 꽃다발을 든 평양 시민들이 광장에서 ‘김일성, 김정은’과 같은 글씨를 만들며 우렁찬 만세를 부르는 가운데 김정은이 손을 흔들며 퇴장할 것이다. 1990년대에 김일성광장에서 직접 열병식 행사에 참가했던 나는 지금은 서울에서 열병식을 수없이 지켜보지만 이젠 열병식에 별 감흥이 없다.

그러나 내일 열병식은 느낌이 완전히 다를 것 같다. 바로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전쟁이 마치 게임 생중계처럼 세계에 실시간 송출되고, 러시아 전차가 휴대용 미사일 공격을 받아 폭발하고, 전투기와 헬기가 불덩이가 돼 떨어지는 영상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서 휴대용 미사일에 속절없이 파괴되는 러시아 전차와 장갑차는 알고 보면 북한에겐 ‘꿈의 전차’들이다. 돈 없어 사올 수도 없고, 기술이 모자라 베끼지도 못하는 T72, T80, T90 전차들이다. 북한군은 아직도 1960년 초반 개발된 T62 계열 전차가 주력이다.

1991년 걸프전쟁 때 이라크군은 소련의 최신형 T72 전차를 포함해 3500여 대의 전차부대를 운용했다. 그러나 미군 에이브럼스 탱크 단 1대도 격파하지 못했고, 전차병 3명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이다. 31년 전에 그랬다. 지금은 남북의 전차 전력이 반세기 이상 차이 난다.

중동전쟁과 걸프전에서 소련제 전차가 전혀 힘을 못 쓰자 일부 전문가들은 “소련이 보급형을 수출했기 때문, 전차병들의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 등으로 설명하며 “진짜 러시아 기갑부대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두둔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진짜 러시아 최정예 기계화 부대가 군사력 순위에서 20위나 차이가 나는 우크라이나군에 힘을 못 쓰고 당하고 있는 장면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제 무기의 허상 역시 생생하게 드러났다.

김정은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볼 것이다. 북한은 세계에서 구소련의 무기 시스템과 군사 교리에 기초해 군이 운용되는 거의 유일한 국가다. 그런데 북한의 우상인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북한이 그렇게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최신 장비를 총동원하고도 창피를 당하고 있다. 전차부대만 힘을 못 쓰는 게 아니다. 러시아 공군도 북한에 없는 SU30, SU34 신형 공군기에 강력한 Mi24, Mi28 공격헬기로 무장했지만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겨우 10여 대를 보유한, 1980년대에 생산된, 미그29는 이번 전쟁에서 고물 취급 받는 낡은 전투기다. 북한의 주력 전투기는 여전히 1950, 60년대 생산된 미그21, 미그23이다.

김정은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김일성광장에서 지나가는 기계화 부대를 보면서 이것도 군대라고 유지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진 않을까. 난 내일 열병식에서 북한군 기계화 부대가 지나갈 때마다 우크라이나 거리와 마을에 뒹구는 포탑이 날아가 녹이 쓴 러시아 전차와 장갑차가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되뇔 것이다.

“고물이 온다, 고물이 간다.”

김일성광장 상공을 나는 비행기들을 보면서도 되뇔 것이다.

“고물이 온다, 고물이 간다.”

이는 재래식 전쟁에서도 세계 군사력 평가 6위인 한국이 28위인 북한에 진다고 주장하는 일부 한국군 장성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금은 남북이 재래식 전쟁을 하면 그냥 고물 청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위성과 무인기로 손금 보듯 전장을 보는 세상에선 고물을 숨길 곳도 없다. 장군님이 명령만 내리면 당장 남으로 진격해 적을 쓸어버릴 수 있다고 믿으며 껑충껑충 행진하는 북한 군인들에게 우크라이나 전쟁 영상을 보여주고 싶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한편으론 북한군이 얼마나 허약한지도 생생히 방증하고 있다. 고물의 퍼레이드가 뭐가 자랑스럽다고 매년 꼬박꼬박 열어 온 세계에 보여줄까. 창피하지도 않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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