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크로비스타와 평양 은정아파트[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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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3일 평양 평천구역 아파트 붕괴 사고 발생 나흘 뒤 인민보안성 고위 장성이 깨끗이 정리된 붕괴 현장에서 수백명의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14년 5월 13일 평양 평천구역 아파트 붕괴 사고 발생 나흘 뒤 인민보안성 고위 장성이 깨끗이 정리된 붕괴 현장에서 수백명의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1995년 6월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북한에서 노동신문을 통해 접했다. 썩고 병든 남조선에선 이런 대형 참사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고 비난했다. 그 전해 10월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소식도 노동신문에 사진과 함께 큼직하게 실렸다. 남조선은 잘사는 사회라고 알고 있던 내겐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대다수 북한 사람들도 한강 다리 상판이 떨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사진을 보면서 남조선은 사람 못 살 사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532명이 사망·실종되고 940여 명이 부상당한 이 참사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한국에 와서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까지 했다. 2004년 6월 삼풍백화점 자리에 주상복합아파트가 건설돼 입주가 시작됐다는 기사를 보고 “저기에 왜 하필 주거시설을 지어야 했을까. 나라면 왠지 께름칙해서 못 살 것 같은데 저기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 배우자 역시 결혼 전에 거기에 거주했다. 풍수가들의 논리에 따르면 대통령이 나온 자리는 길지(吉地)가 되겠는데, 길지라고 하기엔 또 대형 참사가 이해되지 않는다.

10일 새벽 당선이 확정된 윤석열 후보가 아크로비스타를 나올 때 나는 평양 평천구역 은정아파트를 떠올렸다. 불과 8년 전인 2014년 5월 13일 오후 4시 북한의 가장 대표적인 붕괴 참사가 일어난 그 23층 아파트이다. 남쪽에는 평천 아파트 붕괴 사고로 알려져 있다.

이 아파트의 붕괴 역시 부실시공 때문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붕괴 이후 현장은 아파트 잔해인지, 흙더미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아파트 건축을 담당한 군인들이 철근과 시멘트를 빼돌려 팔아먹고, 그 대신 저강도 시멘트를 섞어 건설했기 때문이다.

사망자 수는 북한이 공개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사고 3년 뒤 평양에서 나온 한 북한 간부에게 물어봤더니 300명 정도로 알려졌다고 했다. 북한에서 개별적 회사가 건설해 파는 아파트는 내부 미장까지만 해주기 때문에 골조만 세워지면 그 이후엔 집을 산 사람들이 벽지도 바르고 인테리어도 한다.

평천 아파트 역시 완공도 되기 전에 입주 예정자들이 들어가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남편이 출근한 뒤 집에 남아 작업을 하던 가정주부와 노인들, 건설 후속 작업을 하던 군인 수십 명, 개별 가정의 청부를 받은 건설 전문 인력들, 아파트 주변에서 놀던 어린이들, 밖에서 한담을 하던 다른 아파트의 노인 일부 등이 사망했다. 아파트 붕괴 현장에선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사망자 시신도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다. 김정은의 지시로 굴착기와 덤프트럭을 총동원해 불과 이틀 만에 붕괴 잔해를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피해자 가족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최부일 인민보안상이 직접 나와 사과했다. 북한은 보험이 없어 피해자들은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

붕괴 현장엔 불과 몇 달 만에 똑같은 아파트가 건설됐다. 김정은의 배려로 건설된 아파트란 의미로 은정아파트란 이름이 붙었고, 붕괴 전에 아파트를 샀던 사람들에게 다시 분양됐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그 자리에서 살 리가 만무했다. 북한 당국은 유가족들이 김정은의 ‘은정’을 거부하고 아파트를 팔고 떠나도 이를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문제는 은정아파트가 매물로 나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사겠다고 줄을 섰다는 것이다. 평양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은정아파트가 엄청난 인기를 끈 이유는 표면적으론 김정은의 지시로 건설돼 튼튼할 것이기 때문이라 했지만, 실은 수백 명이 사망해 액막이가 잘된 아파트라고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양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에 이 증언을 2018년에 쓴 저서 ‘평양자본주의백과전서’에도 실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터에서 남조선 대통령이 나왔다는 소식이 북에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역시 액막이가 된 아파트가 최고라며 은정아파트 가격이 치솟을 것 같다. 물론 남쪽 소식을 대다수 북한 사람들이 알 수 없겠지만, 통전부 간부들을 포함한 일부 고위층들은 한국 소식을 접할 수 있다. 게다가 삼풍백화점 붕괴는 많은 북한 사람들도 기억하고 있는 참사이다. 머잖아 북한에 “남조선에 아크로비스타가 있다면 우리에겐 은정아파트가 있다”는 소문이 퍼질지 모르겠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서울 아크로비스타#평양 은정아파트#삼풍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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