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또 팀으로 강해진 한국… 영글어가는 ‘수영강국’ 꿈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24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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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한국 수영 ‘진격의 시대’
박태환 성적 따라 웃고 울던 수영계… 황선우-김우민 등 ‘황금세대’ 등장
호주로 전지훈련 보내 계영 집중 투자… 세계선수권-아시안게임 최고 성적 결실
올해 7월 파리 올림픽 새 역사 정조준

《한국 수영 ‘황금세대’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역대 최다인 금메달 6개를 딴 한국 수영이 19일 끝난 세계선수권에서도 역대 가장 많은 2개의 금메달을 차지하며 다섯 달 뒤 파리 올림픽 전망을 밝게 했다. ‘르네상스’를 맞은 한국 수영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한국은 19일 카타르 도하에서 막을 내린 2024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금 2개, 은 1개, 동메달 2개로 종합 순위 8위에 올랐다. 일본은 공동 17위(금 1개, 은 1개, 동 2개)였다. 한국이 세계수영선수권에서 일본보다 메달을 더 많이 따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회 메인 종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경영(競泳)만 따져도 한국(금 2개, 은 1개)이 일본(금 1개, 동 1개)보다 성적이 좋았다.

2011년 상하이 세계선수권 때도 한국이 15위(금 1개)로 일본(21위·은 4개, 동 2개)보다 종합 순위는 더 높았다. 다만 이 대회에서 메달을 가지고 돌아온 한국 선수는 남자 자유형 400m 정상을 차지한 ‘마린 보이’ 박태환(35) 딱 한 명뿐이었다. 이번 도하 대회 때는 김우민(23), 양재훈(26), 이유연(24), 이호준(23), 황선우(21) 등 5명이 경영 종목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일본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총 83개(금 24개, 은 27개, 동 32개) 따낸 세계적인 수영 강국이다. 일본보다 올림픽 수영 메달이 많은 나라는 미국(579개), 호주(212개), 옛 동독(92개) 등 3개국밖에 없다. 반면 한국 선수 가운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는 박태환(금 1개, 은 3개)뿐이다. 박태환 이전에 한국 수영 간판이었던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1952∼2009),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57) 모두 아시아가 주무대였다. 그랬던 한국 수영이 ‘황금세대’를 앞세워 세계 정상에 도전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수영만 천재’ 황선우
2024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200m에서 1위를 확정한 뒤 손을 들며 기뻐하는 황선우. 세계수영선수권 자유형 200m 금메달은 한국 선수 중에서 황선우가 처음이다. 도하=AP 뉴시스
박태환은 못하는 운동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 타입이다. 폐활량도 7000cc로 일반인(3000∼4000cc)의 두 배 수준이다. 거꾸로 황금세대 선두주자인 황선우는 “물 밖에서는 달리기도 느리고 축구도 못한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편이다. 기초 체력도 부족해 운동장에서 러닝훈련을 하는 것도 힘들어했다.

또 박태환은 기계처럼 일정한 ‘정박자 영법’으로 유명했지만 황선우는 오른팔을 더 크게 내젓는 ‘엇박자 영법’으로 물살을 가르는 것도 차이점이다. 엇박자 영법은 체력 소모는 크지만 순간적으로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에 단거리 선수들이 애용한다. 황선우는 수영 동호인인 부모님을 따라 수영을 배우면서 이 영법을 자연스레 익혔다.

서울체육고에서 황선우를 지도한 이병호 감독은 “선우는 기본적으로 수영을 아주 좋아하는 친구다. 그런 의미에서 선우는 한 번도 ‘해야 하는 수영’, ‘노동으로서의 수영’을 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대신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어 연구하는 자세로 훈련에 임한 것”이라면서 “그 결과 ‘물감’(헤엄치는 감각)에 있어 따라올 자가 없는 선수로 성장했다”고 평했다.

황선우는 서울체육고 2학년이던 2020년 11월 자유형 100m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8초25에 터치패드를 찍었다. 박태환이 2014년 기록했던 48초42를 6년 만에 뛰어넘은 한국 신기록이었다. 황선우는 이듬해(2021년) 7월 열린 도쿄 올림픽 준결선에서는 47초56으로 아예 아시아기록까지 갈아치웠다. 그러나 결선에서는 47초82(5위)로 기록이 떨어졌다.

주 종목인 자유형 200m는 더 심각했다. 황선우는 도쿄 올림픽 예선에서 이 종목 한국기록(1분44초65)을 갈아치웠다. 결선에서도 첫 100m를 49초78에 주파했다. 파울 비더만(38·독일)이 2009년 로마 세계수영선수권에서 세계기록(1분42초00)을 세울 때(50초12)보다 초반 페이스가 더 좋았다. 그러나 마지막 50m를 남기고 힘이 빠지면서 선두에서 7위(1분45초26)로 미끄러졌다. 황선우는 “경쟁 선수들이 갑자기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고 말했다.

요컨대 ‘타고난 물감’으로 올림픽 결선까지 올라갈 수는 있어도 시상대 위에 서려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도쿄 올림픽 당시 한 수영인은 “한국 수영에 ‘체계’라는 게 있었다면 황선우가 미숙한 레이스 운영으로 고배를 마실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모처럼 기회가 찾아왔는데 놓쳤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겠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나 이 걱정은 ‘기우’로 판명이 났다. 황선우는 도하 세계선수권 자유형 200m에서 결승점 10m를 남겨 놓고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5위에 이름을 올린 자유형 100m 결선에서도 후반 50m 기록(24초89)은 가장 빨랐다. 황선우가 이제는 오히려 ‘뒷심’이 장점인 선수로 성장한 것이다. 황선우가 이렇게 힘을 기를 수 있었던 건 대한수영연맹의 ‘전략 종목 육성’ 프로젝트 덕분이다.

기회의 땅, 호주
연맹은 도쿄 올림픽 직후 황선우의 주 종목인 자유형 200m를 중심으로 ‘새판 짜기’에 나섰다. 황선우에게만 지원하기로 한 게 아니다. 200m씩 네 명이 나눠 뛰는 계영 800m를 전략 육성 종목으로 정했다. 연맹은 2022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자유형 200m 1∼4위에 이름을 올린 황선우, 이호준, 김우민, 이유연에게 호주 전지훈련 기회를 줬다.

수영인 출신인 정창훈 연맹 회장은 “2021년 대표 선발전에서 자유형 200m 1∼4위에 오른 선수들을 모아 계영 800m 기록을 측정했다. 당시 한국 기록인 7분11초45가 나왔다. 10초만 줄이면 국제대회에서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했다. ‘특혜를 준다’는 반발도 나왔지만 계영에 집중 투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이호준은 황선우보다 먼저 ‘제2의 박태환’ 타이틀을 얻었던 선수다. 이호준은 서울대사범대부설중 2학년이던 2015년 동아수영대회 남자 중등부 자유형 200m 결선에서 1분52초09의 대회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박태환이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종목에서 남긴 최고 기록(1분57초76)보다 5초67이 빨랐다. 이호준은 고교 진학 후 슬럼프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영법을 수정해 하체를 활용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다시 기록을 줄여가던 중이었다.

2024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1위를 확정한 뒤 손가락 하나를 펴며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김우민. 2011년 박태환의 금메달 이후 13년 만에 이 대회 이 종목에서 금메달이 나왔다. 도하=AP 뉴시스
서울에 이호준이 있다면 부산에는 ‘슈퍼탤런트’ 김우민이 있었다. 박태환처럼 양팔을 잘 쓰는 김우민은 타고난 체력이 좋아 단거리(200m), 중거리(400m)뿐 아니라 장거리(800, 1500m)도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다. 윙스팬이 196cm에 달할 만큼 키(182cm)에 비해 팔이 긴 것도 수영 선수로서 유리한 점이었다.

이유연은 양재훈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넘버 4’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선수다. 이유연은 ‘악바리’라고 불릴 정도로 노력파다. 키 190cm인 양재훈은 ‘피지컬’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들은 2022년 4월 멜버른으로 떠난 첫 호주 전지훈련에서 세계적인 수영 지도자인 이언 포프 전 호주대표팀 감독(62)에게 잠영(潛泳) 거리를 늘리는 비법 등을 전수받았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황선우는 그해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자유형 200m 은메달을 목에 걸면서 메이저대회 첫 입상에 성공했다. 황선우는 동료들과 함께 세계선수권 계영 800m 첫 결선 진출 기록도 남겼다.

지난해 9월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계영 800m 결선에서 한국 수영대표팀 선수들이 금메달이 확정된 직후 양팔을 들며 기뻐하고 있다. 이때 한국은 수영 단체전 사상 처음으로 우승했다. 항저우=뉴스1
전지훈련 효과를 확인한 연맹은 지난해에도 호주 골드코스트에 캠프를 차렸다. 그리고 항저우 아시안게임(9월)에서 아시아 기록(7분1초73)을 경신하며 꿈에 그리던 계영 800m 금메달을 차지했다. 연맹의 계산대로 10초 가까이(9초72) 기록을 앞당긴 결과였다. 한국 수영이 국제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한국 경영은 또 항저우에서 금 6개, 은 6개, 동메달 10개를 따내며 아시안게임 출전 역사상 최고 성적을 냈다. 한국이 아시안게임 경영에서 일본(5개)보다 금메달을 많이 딴 것도 항저우 대회가 처음이었다.

“나도! 나도!”… 전지훈련 열풍
한국 남자 계영 800m 선수단이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다. '호주 전지훈련'은 대한수영연맹이 2022년부터 시작해 올해까지 매년 1차례 이상 진행됐다. 올댓스포츠 제공
한국 남자 계영 800m 선수단이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다. '호주 전지훈련'은 대한수영연맹이 2022년부터 시작해 올해까지 매년 1차례 이상 진행됐다. 올댓스포츠 제공
연맹은 도하 세계수영선수권을 앞둔 지난달에도 골드코스트 전지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지난해 6월에는 이주호(29·배영), 최동열(25·평영) 등 비(非)자유형 선수들에게도 전지훈련 기회를 제공했다. 이주호는 지난해 11월 자비를 들여 호주에 한 번 더 다녀왔다. 그리고 배영 200m 대표 선발전에서 1분56초05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한국 기록을 단숨에 0.49초 앞당겼다. 이주호는 도하 대회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배영 200m 결선에 올라 5위를 기록했다. 호주에만 다녀오면 이렇게 실력이 좋아지는 이유는 뭘까.

한 선수는 “호주에서는 다양한 이론을 근거로 수영을 가르친다. 이게 잘 안 되면 다른 근거를 찾아와 설명해준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내 옷’을 찾게 된다. 그동안 궁금했던 부분도 해소하고 내 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며 훈련을 하니 성과가 더 잘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호주 전지훈련 효과를 본 선수가 하나둘 늘며 수영 선수 사이에 ‘나도 갈래’ 열풍도 이어지고 있다. 다른 선수는 “예전에는 박태환 같은 선수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못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지금은 ‘쟤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하는 분위기가 퍼진 상태”라고 전했다. 이주호도 “호주에 다녀온 뒤 ‘개인훈련 준비를 어떻게 하냐’는 문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현재도 자유형 100, 200m가 주 종목인 김준엽(22), 김지훈(24)이 비자 없이 호주에 머물 수 있는 90일을 꽉 채우는 것을 목표로 시드니에서 자비 전지훈련을 진행 중이다. 연맹 관계자는 “선수들이 ‘칼을 갈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다음 달 22일 시작하는 파리 올림픽 대표 선발전, 그중에서도 남자 자유형 200m는 웬만한 국제대회 못지않게 경쟁이 치열할 것 같다”고 예상했다.

물론 여전히 가장 앞서 있는 건 호주 전지훈련을 세 차례 경험한 기존 국가대표 선수들이다. 연맹은 파리 올림픽 때도 세계선수권과 똑같이 ‘메달 3개’를 목표로 삼고 있다. 파리 올림픽 대표로 뽑히는 선수들 역시 4월부터 호주로 건너가 6주 정도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한다. 이후 국내에서 경기 출전 시점에 맞춰 몸을 만드는 ‘테이퍼링’을 통해 컨디션을 조절한 다음 파리로 향한다. 도하 세계선수권 때는 일정이 촉박해 테이퍼링 없이 바로 대회를 치렀다.

연맹이 파리 올림픽 메달 획득에 가장 공을 들이는 종목은 역시 계영 800m다. 한국 계영 대표팀은 도하 세계선수권에서 7분1초94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차지했다. 파리에서는 메달 색깔을 금빛으로 바꾸겠다는 각오다. 이정훈 대표팀 총감독은 “데이터상으로는 6분대 진입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역대 올림픽에서 6분대 기록은 총 세 번 나왔다. 결과는 한 번도 빠짐없이 금메달이었다. 계영 대표 선수들이 파리 올림픽 때 6분58초55보다 먼저 터치패드를 찍으면 세계기록도 바꿀 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 수영은 이제 “세계기록 경신이 목표”라고 밝힐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왔다. 한 수영계 원로는 “2, 3년만 지나면 황금세대 선수들도 국가대표 선발전부터 긴장하게 될 거다. 판이 뒤집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
#한국#수영강국#수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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