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클레오파트라 낳은 문화계 ‘정치적 올바름’ 열풍[광화문에서/조종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28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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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엽 문화부 차장
조종엽 문화부 차장
해외 문화계에서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열풍이 거세다. 기존 창작물의 경우 작품 서두에 독자나 시청자가 볼 수 있도록 일종의 경고문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출판사 팬맥밀런은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년) 최신판 서두에 “문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 역사의 충격적이던 시절, 노예제의 공포를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글을 실었다. 디즈니도 고전 애니메이션 ‘피터 팬’(1953년)과 ‘아기 코끼리 덤보’(1941년) 등에 흑인 노예, 아메리카 원주민, 아시안 등을 비하한 내용이 담겼다며 경고 문구를 붙여 내보낸다.

아예 원작을 수정하기도 한다. 퍼핀 출판사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비롯한 로알드 달의 소설에서 외모 관련 비하 논란이 일 수 있는 표현을 대거 수정했다. ‘뚱뚱하다’는 표현은 ‘거대하다’로 바꿨고, 마녀를 ‘가발 아래 대머리를 숨기고 있다’고 묘사한 부분에는 별도로 “여성이 가발을 쓰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별도 설명을 달았다. 하퍼콜린스 출판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미스 마플’ 등에 있는 인종차별적 표현을 통째로 삭제했다.

새로운 창작물에서는 흑인 등 소수자를 전면에 배치하는 작품이 늘고 있다. 디즈니는 신작 실사 영화 ‘인어공주’ 주인공에 흑인인 핼리 베일리를 캐스팅했다. 앞서 넷플릭스는 ‘트로이: 왕국의 몰락’에서 신들의 왕 제우스 역에 흑인 배우를 내세웠다. ‘아르센 뤼팽’을 모티브로 한 시리즈물 ‘괴도 뤼팽’에서는 흑인 주인공뿐 아니라 서사에서도 세네갈 출신 이민자였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복수하는 내용을 그렸다.

하지만 ‘억지스럽다’는 반발도 일고 있다. 영화에서 칭기즈칸 역을 백인이 맡았던 것은 인종차별임이 명확한데, 백인이 자연스러울 역할을 흑인 등이 맡는 것이 맞느냐는 주장이다. 과거 아시안 등 비(非)백인 역할을 백인이 연기했던 관행을 두고 ‘화이트 워싱’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뒤집어 ‘블랙 워싱’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콘텐츠에서는 논란이 더욱 거세다. 다음 달 10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다큐 시리즈 ‘퀸 클레오파트라’는 실제로는 흑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은 클레오파트라 배역을 흑인이 맡았다. 한 이집트의 사학자는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였다. 넷플릭스는 이집트 문명의 기원이 흑인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고 반발했다. 픽션이나 드라마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이니 역사 왜곡 논란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글로벌 콘텐츠 제작자들이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차별적 인습을 무신경하게 되풀이하다가는 콘텐츠를 계속 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커진 소수자들을 마냥 무시했다가 자신들이 의지해 있는 사회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본다.

콘텐츠에서 특정 집단에 대해 비하하거나 왜곡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건 소수자에게 보이지 않는 펀치를 날리는 것과 같다. 사실 한국인이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수전노 같은 모습으로 왜곡됐던 것도 얼마 안 됐다. 구부러진 막대를 펴려면 반대쪽으로 힘을 줘 구부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정치적 올바름#글로벌 콘텐츠 제작자#퀸 클레오파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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