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억압했지만 내 일부였던 공간들… 끌어안고 뜯어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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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작가 하이디 부허 회고전
가부장적 공간, 파괴하는 대신
피부처럼 덮은 다음 표면 떼어내
아트선재센터 6월 25일까지 전시

한 여자가 오래된 집의 벽을 덮은 껍질을 뜯어낸다. 라텍스로 만든 껍질은 풀과 거즈를 바른 벽에 밀착돼 여자는 안간힘을 쓰며 이를 떼어낸다. 벽의 살갗이 떨어져 나가는 듯 삐걱대는 소리도 들린다. 그녀는 스위스 출신 예술가 하이디 부허(1926∼1993·사진)다.

아버지 서재와 조상 대대로 살던 집, 감옥과 병원에 껍질인 ‘피부’를 붙이고 뜯어낸 흔적으로 만든 그녀의 작품들이 한국을 찾았다. 부허의 작품과 영상 기록 등 130여 점을 선보이는 아시아 첫 회고전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가 28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했다.

● 억압하는 공간의 껍질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1988년·오른쪽), ‘작은 유리 입구’(1988년)가 전시된 전경. 사진 제공 CJY ART STUDIO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1988년·오른쪽), ‘작은 유리 입구’(1988년)가 전시된 전경. 사진 제공 CJY ART STUDIO
부허는 1970, 80년대 공간에 풀을 바른 뒤 라텍스를 덮은 다음, 그것을 떼어내는 스키닝(skinning) 연작을 했다. 떼어낸 라텍스는 공간 형태 그대로 전시돼 허공에 공간의 껍질이 떠 있는 듯한 모양을 연출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진찰실, 요양원 등의 벽이나 문의 형태는 물론이고 벽에 묻은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작품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부허는 공간의 ‘피부’라고 표현했다. 흰색, 베이지색이었던 작품은 차츰 누렇게 변해 시간의 흔적도 담겼다. 부허가 아버지의 서재, 선조들의 집, 벨뷰 요양원에서 라텍스를 뜯어내는 모습을 담은 영상도 볼 수 있다.

1978년 하이디 부허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스키닝 작업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작품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의 한 장면. 그의 아들 인디고 부허가 촬영했다. 사진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1978년 하이디 부허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스키닝 작업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작품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의 한 장면. 그의 아들 인디고 부허가 촬영했다. 사진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부허가 초기에 선택한 공간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재였다.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1978년)은 서재 바닥의 껍질을 뜯어낸 뒤 46개 조각으로 자른 작품이다. 부허의 아들 인디고는 27일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이 작품에 대해 “(어머니가) 마룻바닥 껍질을 조각낸 다음 그것을 어딘가로 보내려는 듯 여행 가방에 담았다”고 했다. 부허는 이 가방을 ‘하이디 아발로네(전복)’라고 이름 붙였다. 묵은 기억을 전복 껍질처럼 단단한 곳에 가둔다는 의미로 보인다.

부허는 1970년대 초 남편 카를 부허와 이혼하고 미국에서 스위스로 돌아온 뒤 자신만의 작업을 시작했다. 그 후 부모의 오래된 집에서 껍질을 만들고 떼어내며 누구의 딸이나 아내가 아닌 온전한 자신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이 과정을 2021년 독일 뮌헨 하우스데어쿤스트 전시에선 ‘탈바꿈’(metamorphosis)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냈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성충이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녀의 작업은 감옥, 정신병원 등으로 확장됐고 이는 사회적 억압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 뜨겁게 끌어안고 떼어내다
부허의 스키닝 연작은 단순히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개인을 억압한 공간을 파괴하는 대신 그 표면을 피부처럼 덮은 다음 거기에 묻은 모든 것을 떼어내기 때문이다. 마치 내 일부였지만 버려야 할 것들을 마지막으로 힘차게 끌어안는 듯이.

인디고는 어머니가 스키닝 작업을 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내면의 변화를 원했기에 아버지, 남편은 물론 사회의 억압적인 여러 면면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 집을 박차고 나왔다면, 부허는 그 집에 남은 먼지 한 톨까지 껍질에 붙인 다음, 이를 떼어낸 후 매달아 버린다. 마치 뱀이 벗고 나간 허물처럼. 작품들은 그렇게 그녀가 끊임없이 버리고 성장하려 애쓴 흔적이다.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이 최근 높아지면서 부허는 활발히 재조명되고 있다. 2004년 스위스 취리히 미그로스현대미술관 회고전을 시작으로 2013년 파리 스위스 문화원, 2021년 독일 뮌헨 헤우스데어쿤스트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6월 25일까지. 5000∼1만 원.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스위스 작가#하이디 부허#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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