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절약, 도매가 상한제로는 한계 있어
전력 시장·요금체계, 포괄적 재설계 필요하다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전기요금 현실화를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다. 적자도 적자지만 문제는 그 내용이다. 일단 낮은 전기요금 때문에 심각한 에너지 낭비가 전방위로 누적되고 있다. 최근의 한 집계에 따르면 한국의 주택용 전기요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7위로 독일의 20%, 일본의 40% 수준이었다. 한국 제조업의 에너지 효율성 역시 OECD 최하위권이다.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 같은 에너지 절약 캠페인도 도움은 되겠으나 근본적인 가격 조정 없이 에너지 소비와 수입을 줄이고 폭발 직전의 한전 적자 문제를 해결하며 작금의 경제 위기를 타개하는 건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다.
시장 원리를 따르는 전기요금은 에너지 빈국이 에너지 자립을 이룩하고 인류의 공동 목표인 기후변화 저지에 일조하는 데도 빠질 수 없는 정책 수단이다. 정부 보조금만으로 에너지 전환을 기대하긴 힘들다. 친환경 기술에 투자할 인센티브는 화석 연료가 비쌀 때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 현황을 보면 총 배출량의 90% 가까이가 에너지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이 중 40% 정도가 발전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앞으로 내연기관 퇴출이 가속화하면 온실가스 감축에서 발전 부문의 중요도는 더 커질 것이다. 역설적으로 지금이 전력산업 재도약에 적기일 수 있다.
따라서 시장 원리의 전폭적인 도입보다 정부가 완만하게 가격을 조정하는 편이 손익 양쪽을 다 고려한 최선의 대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는 시장이 못해주는 부분을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고 가격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다른 선진국들처럼 시장은 시장답게 돌아가도록 놔주고 부족한 부분은 시장 밖에서 채워야 한다. 전기요금 인상이 초래할 경쟁력 손실은 재정 정책으로 메울 수 있는 부분이다. 법인세 인하 등 재정 보조를 적절히 병행하되 지원을 점차 줄여가며 장기적으로 재정 건전성과 혁신 인센티브를 살리면 된다. 그래야 국가 차원에서 에너지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같은 돈을 써도 시장을 경유한 간접 지원보다 직접 지원이 더 효과적이란 얘기다.
한전 적자는 당장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경제 안보, 신(新)성장동력 창출, 기후 변화 등 국가 핵심 현안들과 직결된 복잡한 사안이다. 도매가 상한제 같은 땜질식 처방으론 어림도 없고 위원회 하나 만들어 전기요금을 올린다고 끝날 일도 아니다. 미시 및 거시와 금융을 망라하고 국민 세금 투입과 분배 문제를 수반한 총체적 경제 이슈다. 문제가 복합적이니만큼 복합적 대응이 필요하다. 많은 허점을 노출한 탄소 배출권 시장의 재편 등 환경 이슈까지 함께 고려한 전력 시장과 요금체계의 포괄적 재설계를 고민해야 한다. 발전사는 횡재세가 아니라 탄소세를 내야 한다. 한전 또한 경쟁과 혁신을 촉진할 실질적인 구조 조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준비되기 어렵고 정치 현실도 녹록지 않다. 하지만 에너지는 이번 위기의 진원이자 동시에 엄청난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에너지 효율화는 안 그래도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다. 하루빨리 지혜와 의지를 모아야 한다.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