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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책의 향기]‘늦깎이 문청’이 남기고 간 따뜻한 위로

입력 2022-05-14 03:00업데이트 2022-05-1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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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이순자 지음/256쪽·1만5000원·휴머니스트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이순자 지음/192쪽·1만2000원·휴머니스트
고 이순자 작가(오른쪽)가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과 재학 당시 스승인 이문재 시인(왼쪽)과 함께 찍은 사진. 휴머니스트 제공
“엄마, 이제 엄마 인생을 시작해 봐.”

딸아이의 한마디에 늦깎이 문청(文靑)이 됐다. 한 번도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저자는 쉰넷의 나이에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무심코 켠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은 한 사이버대학의 입학전형. 오랜 세월 읽기만 했지, 글을 직접 쓰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글을 쓰고 싶어져 문예창작과에 지원했다. 종갓집 맏며느리에 두 남매의 엄마로 사느라 잊고 지냈던 꿈이었다. 선천적인 감각신경성 난청으로 청각장애가 있는 저자는 말보다 글이 더 편했다. 혹시나 잘못 들었을까 삼켜버린 말들을 컴퓨터에 빼곡히 쌓아나갔다.

62세에 취업 전선에 나선 경험을 담은 수필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된 저자의 유고 산문집과 시집이다. 저자는 당선 후 한 달 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몇 달 뒤, 소셜미디어에 고인의 이야기가 알려지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고 산문집과 시집에는 “내 문학은 이제 시작”이라며 만학의 꿈을 꿨던 저자가 생전 써내려간 짧은 글 24편과 시 75편이 담겼다.

사이버대학에서 저자에게 시를 가르친 이문재 시인은 유고 시집의 서문에 이 시집을 ‘자서전’이라고 칭했다. 시 ‘유복자(遺腹子)’에는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요양보호일기’와 ‘독거노인의 자화상’에는 호스피스로 일하며 만난 환자들과의 일화가 담겼다. 산문집에는 동성동본이란 이유로 헤어진 첫사랑 이야기부터 청각장애인으로 평범한 세상과 동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생애가 녹아 있다. 남들보다 늦은 황혼에 글을 쓰기 시작한 저자는 결핍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담담히 기록했다. 가난, 장애, 이혼은 그에게 부끄럽거나 숨길 게 아니라 자신을 더 잘 알아가기 위해 직면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고 이순자 작가의 생전 모습. 휴머니스트 제공
오히려 저자는 “몸도 마음도 아파봤기 때문에 고통받는 타인에게 품을 내어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시와 산문에는 타인을 대하는 저자의 사려 깊은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선천적 질병을 앓는 쌍둥이 손자를 돌보며 아들 부부의 고통을 나눠지고도 ‘고통을 잘 따라가 보면 꿀같이 다디단 열매가 거기 스윽 열려 있다’고 한다. 불쑥 남의 집에 드나드는 어르신들에게 거리를 두기보다 덥석 팔짱을 끼며 그들의 외로움을 끌어안는다. 호스피스로 암 병동에서 일할 때 환자에게 “안녕하세요”라는 안부를 묻기보다 슬며시 다가가 퉁퉁 부은 발을 먼저 주물렀다는 일화는 시 ‘안녕히 주무세요’에 담겼다.

두 자녀의 엄마이자 호스피스이자 시인으로 한평생 타인을 끌어안은 저자를 닮아서일까. 딸은 수녀가 됐다. 산문집 서문에는 어머니의 유고집을 펴내는 딸의 편지가 실렸다. ‘사랑받지 못했기에 더 사랑할 줄 알았던, 가지지 못했기에 더 채워줄 줄 알았던 이 작은 이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외롭고 허기진 마음을 위로하리라 믿습니다.’ 시보다 더 넓고 컸던 시인의 삶을 읽다 보면 그의 넉넉한 품에 안겨 위로받는 듯하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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