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토끼, 통념 뒤집으려 최대한 무섭게 만들었죠”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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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최종후보 ‘저주토끼’, 정보라 작가-허정범 번역가
몰락한 친구 원한 갚는 이야기, 등장인물 덤덤한 태도 더 오싹
정, 美서 슬라브 문학으로 박사 “러 문학, 꿈-현실 섞어 이야기 창조”
허 “아이러니한 문장 살리려 노력”

단편소설집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는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보단 잔인한 소설을 많이 쓴다. 하지만 표제작 ‘저주토끼’처럼 누가 내 머리를 갉아 먹는 건 싫다”며 웃었다. 동아일보DB
단편소설집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는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보단 잔인한 소설을 많이 쓴다. 하지만 표제작 ‘저주토끼’처럼 누가 내 머리를 갉아 먹는 건 싫다”며 웃었다. 동아일보DB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단편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아작)의 표제작 ‘저주토끼’는 끔찍한 소설이다. 대대로 저주용품을 만드는 할아버지가 모형 저주토끼를 만든다. 억울하게 몰락한 친구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다. 저주토끼는 원수의 손자 뇌를 갉아먹는다. 친구의 원수 집안은 삼대(三代)가 처참하게 몰락한다. 소설이 더 무서운 건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모두 덤덤하기 때문이다.

작가도 소설처럼 무서운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8일 온라인으로 만난 정보라 작가(46)는 시종일관 웃으며 친절하게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그는 “코미디언이 자기 농담에 먼저 웃으면 관객들이 안 웃는다”며 “공포 소설도 작가가 먼저 호들갑을 떨면 김이 새지 않냐”고 했다. “통념을 뒤집어야 독특한 이야기가 생겨요. 토끼는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최대한 무섭게 만들어 보기로 했죠.”

그의 부모님은 둘 다 치과의사였다. 유년시절 집은 치과와 연결돼 있었다. 치과에도, 집에도 연구용으로 갖다놓은 두개골 모형이 있었다. 인체 구조도도 집 벽에 붙어 있었다. 이 때문인지 정 작가는 인체를 공포 소설에 적극 활용한다. 단편 ‘머리’에서는 변기에서 머리가 튀어나오지만 등장인물들은 놀라지 않는다. 정 작가는 “어릴 적엔 친구들 집에도 두개골 모형과 인체 구조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커서 보니 저만의 독특한 경험이었다”며 “공포 소설을 쓴 날에도 악몽은 안 꾼다”고 했다.

부커상 심사위원들은 정 작가의 작품에 대해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평가했다. 남자친구도 없는 미혼 여성이 임신하고(단편 ‘몸하다’), 아무도 없는 암흑에서 목소리가 들리는(단편 ‘차가운 손가락’) 일이 능청스럽게 벌어진다.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를 취득한 것이 영향을 끼쳤다.

“현실과 상상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 게 러시아 문학의 특성이에요. 도스토옙스키, 고골 등 러시아 대문호도 꿈과 현실을 섞어 쓰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창조했죠.”

왼쪽부터 ‘저주토끼’ 영문판과 허정범 번역가. 동아일보DB
왼쪽부터 ‘저주토끼’ 영문판과 허정범 번역가. 동아일보DB


한국에선 비주류에 속하는 공포, 공상과학(SF) 장르인 ‘저주토끼’를 발굴한 건 번역가 허정범(41·안톤 허)이다. 허 번역가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애초부터 변두리에 있는 이야기를 번역하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저주토끼’에 끌렸다”고 했다. 공식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 데다 국내 독자에게 생소한 정 작가를 소개하는 게 부담되지 않았냐고 묻자 허 번역가는 “한강 작가가 2016년 ‘채식주의자’로 한국인 최초로 이 상을 받기 전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냐”고 대차게 되물었다.

허 번역가가 가장 공을 들인 건 문체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When we make our cursed fetishes, it‘s important that they’re pretty)처럼 유머와 공포가 뒤섞인 정 작가의 문장이 서양 독자들의 마음을 끌 것이라 생각했다. 허 번역가는 “제인 오스틴,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영미권 작가들은 상반된 정서가 담긴 문장을 많이 쓴다”며 “정 작가의 서양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문장을 최대한 살리려 했다”고 말했다.

수상작은 다음 달 26일 발표한다. 올가 토카르추크(폴란드)의 ‘야곱의 책들’(The Books of Jacob), 욘 포세(노르웨이)의 ‘새로운 이름’(A New Name), 가와카미 미에코(일본)의 ‘천국’(Heaven), 클라우디아 피네이로(아르헨티나)의 ‘엘레나는 안다’(Elena Knows), 지탄잘리 슈리(인도)의 ‘모래의 무덤’(Tomb of Sand)이 함께 최종 후보에 올랐다. ‘저주토끼’는 수상이 가능할까. 허 번역가는 망설이다 답했다.

“가요나 드라마에 비해선 한국 문학이 영미권에서 인정받는 상황은 아니에요. 수상 가능성은 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받는다면 진짜 엄청난 일이 될 겁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저주토끼#부커상 최종후보#정보라 작가#허정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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