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수영]靑 인사 원칙은 “케바케”… 비서관에게 읍소하는 장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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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영 정치부 차장
홍수영 정치부 차장
11일 한 전직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동아일보 신년기획 “새 정부 인사, ‘한국판 플럼북’으로”를 보고 털어놓을 게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재임 시절 국장단 진용을 짜려면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읍소해야 했다고 했다. 청와대 비서관은 1, 2급 공무원으로 장관보다 직급이 낮다. 그에 따르면 비서관은 “일단 올려보라”고 한다. 한참 기다리면 다른 명단이 온다. 왜 안 되는지 알 수도 없다. 답답해서 물어보면 각종 이유를 댄다. “누구는 같은 사유인데 넘어갔잖느냐”고 항변해도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사안마다 다르다)”라는 말만 돌아왔단다.

청와대는 ‘대통령 뜻’이라는 무기와 ‘공직 기강’이라는 명분으로 인사에 전방위로 개입할 수 있다. 부처 과장, 국장들도 승진을 시켜 주는 ‘분’이 청와대 비서관임을 다 안다. 전직 장관은 “이래 가지고 장관이나 기관장이 내부에서 소신껏 뭘 해보려고 해도 무슨 영(令)이 서겠느냐”고 한탄했다. 일선의 부처 공무원, 경찰, 군인 할 것 없이 다 청와대만 쳐다보고 있는 현실. 대통령의 인사권은 그런 것이다. 제왕에 빗댈 만큼 한국 대통령이 막강한 파워를 갖는 근간에는 경계선 없이 휘두를 수 있는 인사권이 있다.

취재를 하며 청와대 인사 실무를 했던 이들에게 두루 들었다. 그간의 공공연한 비밀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선 캠프 멤버를 인력 풀로 깔고 각 기관에서 형식상 인사 추천을 받는 것은 기본이다. 자신이 추천한 인사를 관철시키려 대통령비서실장과 인사수석 간 명단을 갖고 언쟁을 벌였다는 일화도 있었다. ‘대통령의 의중’을 팔며 청와대와 여권 실세들은 암암리에 친소 관계에 따라 자리를 나눠 줬다.

역대 대통령들은 이를 몰랐을까. 적어도 대물림돼 온 관행까지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청와대에 대한 절대 복종을 이끌어낼 최고의 무기를 포기하기 싫었을 테다.

그렇다면 ‘한국판 플럼북’으로 대통령의 인사권을 규정된 범위 내로 제한하면 반드시 대통령에게 불리할까. 꼭 그렇지도 않다. 지금 유력 여야 후보의 캠프에는 “내가 이만큼 표를 확보해 왔다”는 인사들이 수두룩하다. 공짜는 없다. 정치권을 10년여 관찰한 결과 여당 인사들이 자당 대통령에게 돌아서는 순간은 의외로 ‘소박’하다. 한 중진 의원이 대통령을 공개 비판하기에 사석에서 들어보니 “○○부 장관 자리에 안 보내줬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사람은 ‘외상 장부’다. 아예 자리를 놓고 애먼 기대를 못 하게 해야 한다.

국정 과제를 다루는 자리에 적임자를 앉힐 수 있는 길도 열린다. ‘한국판 플럼북’을 만들 경우 대통령이 장차관, 청장 외 주요 공기업 사장을 직접 임명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전제가 있다. 직을 걸고 나머지 자리에는 인사 불개입을 명확히 선언하는 것이다. 그래야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늦다. 외상 장부가 청와대 집무실 책상에 이미 놓여 있다. 누가 20대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그래야만 공직 사회가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는 비정상도 막을 수 있다.



홍수영 정치부 차장 gaea@donga.com


#청와대#비서관#케바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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