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만 앞세우면 지속가능한 산재예방 어렵다[동아광장/최재욱]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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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산재 사망 1위’ 오명에 법 제정
사업주 책임 지운 중대재해처벌법
책임소재 어려워 법적 다툼 급증할 듯
기업의 자발적 예방관리 동시 추진해야

최재욱 객원논설위원·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
최재욱 객원논설위원·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
현장실습 고등학생의 잠수 작업 중 산재 사망 발생과 같은 후진적이고 비극적인 안전보건 현실. 지난 20여 년간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산재 사망률 1위. ‘K방역’과 ‘K문화’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단면이다. 2022년 1월 27일 시행 예정인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된 배경이다.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과 같이 이 법의 취지는 기업이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위반해 중대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사업주 혹은 최고경영자(CEO)를 형사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안전보건 확보의무 위반자에 대한 처벌의 하한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상한을 대폭 상향하여 법적인 책임은 지지 않고 도의적인 책임만 지는 과거 사례를 줄이는 근거를 마련했다. 또 중대재해처벌법을 통하여 원청 사업장에 대한 안전보건의 책임 명확화를 위하여 원청에 포괄적 장소 구속성 책임을 정의한 것은 의미가 있다. 안전보건 관련 법령 관리의 범위와 실질적인 지배 운영 관리하에 있는 기업과 사업장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추가해 근로자뿐만 아니라 사업장 관련 시민의 중대재해에 이르기까지 기업의 경영책임자, 원청, 발주처 등은 실질적인 책임을 지게 됐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은 최근 강조되는 기업의 ESG 경영 즉, 안전보건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경영 책임의 확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는 중대재해법 시행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우려와 두려움도 매우 크다. 중대재해의 발생 위험이 상존하는 건설업계에는 중대재해법상 모든 이행 의무를 다하고 안전장치와 체계를 갖춰도 100% 산재 예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측면이 있다. 상시 고용 근로자 규모가 큰 사업장이나 위험성이 큰 작업의 경우 사고 발생 확률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다. 상시 근로자 규모와 관계없이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경우 중대재해처벌법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우며 더구나 본 법의 제정 목적을 산재예방에 두고 있다는 정부의 입장과도 배치된다. 즉 5인 미만 사업장 법 적용 제외, 50인 미만 사업장 유예기간 적용과 특히 산재예방관리의 핵심인 안전·보건 업무를 총괄·관리하는 전담조직 설치 기준 사업장을 상시근로자 수 500명 이상 및 시공능력 상위 200위 내 건설사업자로만 제한한 것은 사고 예방보다는 처벌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실제 기업 안전보건 관리자들이 모인 사회관계망에서는 산재 발생 이후 관리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한 우려와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쳐 나가면서 책임과 권한이 명확해지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막연히 규정하고 있는 필요 예산과 안전보건 관계 법령의 모호한 범위로 인한 의무 이행의 어려움, CEO의 산재예방 의무 소홀 혹은 종사자 과실이나 산재예방 체계의 미비 때문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목소리들은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현대 기업 활동은 글로벌 협력을 바탕으로 네트워크화되어 원청과 협력업체 간 안전보건 조치이행 책임 소재를 명백하게 확정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향후 중대재해 발생 시 사업주와 CEO를 대상으로 하는 법적 다툼이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에 안전·보건확보 의무와 관련해 통상 ‘관리상 의무’를 넘어 산재 예방을 위한 체계적인 인력 및 예산 배정 의무까지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의 인력과 예산 집행권한은 대표이사에게 있다는 점에서 법 적용과 현실의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실제 기업에서 안전보건 담당 관리책임자에게 대표이사가 관련 예산, 인사 및 조직에 관한 권한을 주는 것이 가능할지, 이에 대한 경영진, 이사회와 주주들의 의사결정 및 지배구조에 대한 논의 등 갈 길이 멀다.

20년 전 민관 합동으로 산재예방관리 개선을 위해 미국과 영국의 산업안전보건체계를 검토한 바가 있었다. 산업 구조의 변화와 기술 진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업의 자발적인 산재예방관리와 중대재해처벌법(기업 책임의 강화) 제정이라는 두 가지 핵심 정책이 논의됐다. 기업의 자발적 예방관리와 책임의 강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균형과 보완을 전제로 반드시 동시에 추진되어야만 한다. 처벌 위주로 되어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은 지속가능한 체계로서 산재예방관리를 실행하기 위해 전면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최재욱 객원논설위원·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


#처벌#산재예방#사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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