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잃은 아픔 저도 알아요”…서로를 품는 극단선택자 유족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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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극단선택자 유족 돕는 극단선택자 유족들
‘동료 지원 활동가’ 8명 첫 선발, 위로 통해 되찾은 삶의 의지
익명으로 슬픔 나누는 ‘얘기함’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의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모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를 따라해 주세요. 왼손은 오른쪽 가슴에, 오른손은 왼쪽 가슴에 올립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을 ‘토닥토닥’ 해주세요.”

지난달 26일 경북 구미정신건강복지센터. A 씨(65·여)의 말이 끝나자 그의 주변에 둘러앉은 남녀 4명이 자신의 양팔을 ‘X자’로 포개 스스로를 다독였다.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자신을 안아주는 안정 기법 중 하나인 ‘나비포옹’이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주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험을 갖고 있다. 견디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았다는 의미에서 전문가들은 이들을 ‘생존자’라고도 부른다. A 씨도 그렇게 딸과 사별한 유족이다.

보건복지부와 산하 재단법인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은 A 씨 같은 유족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유족을 돕는, 이른바 ‘동료 지원 활동가’를 양성하고 있다. 복지부와 재단은 전국의 정신건강복지센터를 통해 유족을 추천받아 8명을 1기 활동가로 선발했다. 이들은 지난해 7∼10월 전문 상담 교육을 받았다. A 씨를 포함해 5명은 현재 여러 상담모임의 리더로 활동 중이다. 나머지 3명은 온라인상에서 유족을 돕고 있다.

○ ‘정답 없는’ 문제를 함께 해결하다
상담모임에서 쓰는 카드. 사별 후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묻는 질문들이 적혀 있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제공
상담모임에서 쓰는 카드. 사별 후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묻는 질문들이 적혀 있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제공
사실 복지부와 한국기자협회가 마련한 권고기준에 따르면 가급적 자살사건은 보도하지 않고 직접적 표현도 삼가야 한다. 그러나 이번 취재에 응한 유족들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최대한 정확한 표현을 기사에 쓰길 원했다. 이에 따라 일부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했지만, 고인들의 이야기는 모두 유족의 동의를 얻었다.

A 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구미정신건강복지센터 모임에 앞서 50개의 카드를 준비했다. 가족과 사별한 뒤 맞닥뜨릴 수 있는 어려움들을 질문으로 구성한 카드다. 각각의 카드 앞면에는 ‘슬픔 때문에 음주나 흡연을 한 적이 있나요?’ ‘고인이 떠나고 난 후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등의 질문이 1개씩 적혀 있다. 모임에 참석한 유족들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처음 떠오르는 느낌과 생각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튼다.

카드를 뒤집으면 뒷면에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4개의 질문이 있다. ‘슬픔 때문에 음주나 흡연을 한 적이 있나요?’라고 적힌 카드 뒷면에는 △어떨 때 음주나 흡연을 반복하게 되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얻게 되는 것과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줄일 방법이 있을지를 묻는 질문이 적혀 있다. 경험을 나눈 뒤 그 원인을 탐색하고 상황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며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다.

가족과 사별한 뒤 정답이 없고, 쉽게 해결할 수도 없는 질문에 빠진 유족들은 이러한 대화를 통해 조금씩 답을 찾아 나선다. 남편과 사별한 지 얼마 안 된 여성이 “남편이 쓰던 물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으면 배우자와 사별한 지 오래된 다른 유족이 “눈에 띄는 곳에 두면 너무 힘드니까 상자에 담아서 보이지 않는 곳에 두라. 보고 싶을 때만 꺼내 보라”고 조언하는 식이다.

○ 유족을 세상으로 끄집어내는 사람들

결혼 전 난임 판정을 받았던 A 씨에게 딸은 기적 같은 존재였다. 아이에게 주는 것은 무엇도 아깝지 않았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 딸이 10년 전,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깊은 어둠 속에 빠진 A 씨를 세상 밖으로 꺼내준 건 다름 아닌 유족 모임에서 만난 이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자식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내 아픔을 꺼내고 위로받으면서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체념하고 포기하기보다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반짝반짝 빛나게 살아 보자고. 물론 지금도 너무 아이가 보고 싶어요.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던 날, 아이에게 처음으로 심부름을 시키고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봐 몰래 뒤따라갔던 날…. 생생하게 생각나고 그리워요.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모임 리더로 활동하는 윤유자 씨(67·여)도 마찬가지다. 윤 씨에게는 10대부터 정신질환을 앓던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 윤 씨는 평생 동생을 살뜰히 보살폈다. 자신은 1만 원짜리 티셔츠를 입으면서도 동생을 위해서라면 늘 값비싼 옷을 사다 주는 누나였다.

그런 동생이 7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윤 씨는 2년 동안 단 하루도 잠을 푹 자지 못했다. 얼핏 잠에 들었다가도 동생 끼니를 챙겨 줘야 한다는 생각에 놀라 일어나곤 했다. 불면만큼 윤 씨를 더 괴롭게 한 것은 후회. 윤 씨가 어두운 감정에서 벗어나는 데도 다른 유족의 도움이 컸다.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순댓국밥인데 제가 그걸 잘 안 사 준 게 너무 후회되는 거예요. 한 번이라도 밖에 더 나가라는 의미에서 직접 식당에 가서 사 먹으라고 했거든요. 근데 동생이 떠나고 나니 ‘그냥 내가 사다 줄걸’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이 얘기를 다른 유족한테 하니까 그분이 ‘내가 사주겠다’며 순댓국밥 사서 동생이 있는 봉안당에 같이 가줬는데 그게 얼마나 고맙던지…. 이제는 제가 다른 사람을 돕고 있으니 하늘에서 동생이 ‘역시 우리 누나!’라고 생각하겠죠?(웃음)”

○ “언제나 당신의 말을 들어 줄게요”

유족 중에는 모임을 찾을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세상을 떠난 가족이 심장마비, 교통사고 등으로 사망했다고 하거나 이민이나 유학 등 국내에 없다는 식으로 주위에 얘기해 상황을 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운영하는 온라인 사이트 ‘얘기함’에는 이런 유족들이 익명으로 글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고인의 기일에, 생일에, 갑자기 고인이 보고 싶을 때 유족들은 이곳을 찾아 글을 남긴다. 동료 지원 활동가들은 그 글에 답글을 단다.

“목련이 소리 없이 봉오리를 맺을 때 떠난 내 딸아. 목련은 다시 맺는데 넌 어디 갔니? 너무 너무 보고 싶고 그립구나. 외롭게 보내서, 널 지켜주지 못해서…. 엄마는 죄의식에 발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유족)

“따님이 떠난 계절이 다가오면서 그리움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심이 느껴집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족분들은 고인이 떠나게 된 이유가 ‘나의 잘못’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저 역시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간병하며 함께 있었기에 한동안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고인께 항상 최선을 다했습니다….(하략)”(활동가)

“보건소에서 상담을 하러 오라는데 가면 또 아이 이야기를 해야 하고 저는 주체할 수 없이 울 거라 가질 못했습니다. 선생님 말씀 너무 감사하고 제 마음에 새겨 보겠습니다. 다음엔 용기 내 보건소에 가서 마음 치료를 받아 보고 싶습니다.”(유족)

4년 전 어머니와 사별한 여찬후 씨(39·여)도 이렇게 답글을 다는 온라인 활동가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꼭 말하고 싶은 그 마음을요. 저희에게 맘껏 털어놓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당신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고.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3799명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자살이 1건만 발생해도 5∼10명의 유족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이를 바탕으로 추산하면 관련 유족은 국내에 매년 적게는 7만 명에서 많게는 13만8000명 가까이 새로 발생한다.

활동가들은 유족을 ‘작은 무인도’라고 표현했다. 왁자지껄한 세상과 멀리 떨어져 아무도 찾지 않는 곳. 너무 작아 지도에조차 표시되지 않는 섬. 그리고 자신들은 이 무인도와 무인도를 잇는 ‘다리’에 비유했다.

수만 개의 무인도들은 느리지만 조금씩 연결되고 있었다.

유족들 평균 2년 지나 심리치료 등 받아… 사건발생 즉시 전문인력 도움 절실

일반인보다 18배 더 우울… ‘원스톱 서비스’ 일부지역 시범실시
정부 “2023년까지 전국 확대”


스스로 세상을 떠난 사람의 가족은 대부분 정서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삼성서울병원이 2018년 내놓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이 같은 상황에 놓인 유족은 일반인보다 18.3배 더 우울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심리 치료를 제때 받는 경우도 드물다. 이구상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사업총괄본부장은 “유족들의 평균 ‘치료 지연 기간’이 2년 정도”라며 “사건이 막 발생해 정말 힘들 때는 도움을 받지 못하다가 2년가량 시간이 지나 뒤늦게 일상 회복에 나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유족을 돕는 활동가 조동연 씨(46)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15년 전 아버지와 사별한 뒤 남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 아내, 자녀를 챙기느라 정작 본인은 아버지를 애도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조 씨는 아버지 사망 후 3년이 지난 뒤부터 우울증을 겪었다. 그는 “당시에 좀 더 빨리 적절한 도움을 받았다면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덜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며 “다른 사람은 나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건이 발생한 이후 전문 인력이 즉시 유족을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미국과 영국, 호주 등에서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전문 인력이 유족에게 먼저 다가가 심리 치료부터 법률 상담, 금전적 지원을 해 준다.

국내에 이와 비슷한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부터 ‘원스톱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제도를 운영 중이다. 지역의 정신건강복지센터나 자살예방센터에서 사회복지, 간호, 심리 전문가들이 24시간 대기하고 있다가 사건이 발생하면 바로 유족을 만나기 위해 관할 경찰서로 간다. 하지만 아직은 인천과 광주, 강원 등 일부 지역에서만 시범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도 빠르고 적극적으로 유족들에게 개입해야 할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며 “원스톱 서비스를 2023년까지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제도 못지않게 사회적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유족에 대한 낙인이나 사회적 편견을 줄이려는 노력이 있어야 이들이 더 빨리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극단선택자 유족#심리치료#동료 지원 활동가#익명#얘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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