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인사이트]선관위 “현수막 규제 풀겠다” vs 정치권 일각 “과열 부채질”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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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 선거법 개정의견 제출

시민단체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이 3월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궐선거 왜 하죠?‘ 등 문구를 선거법 위반으로 판단한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하고 있다. 뉴시스
시민단체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이 3월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궐선거 왜 하죠?‘ 등 문구를 선거법 위반으로 판단한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하고 있다. 뉴시스
전주영 정치부 기자
전주영 정치부 기자
《4·7 재·보궐선거 때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 독려 현수막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위선’ ‘무능’ 등 문구에 대해 사용 불가 결정을 내렸다. 이 문구가 더불어민주당을 지칭한다는 걸 유권자가 유추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당의 공식 선거운동이 아닌 투표를 독려하는 캠페인엔 특정 정당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있으면 안 된다는 공직선거법 조항에 근거한 것. 하지만 국민의힘과 국민의당 등 야당은 선관위의 편파 판정 논란을 제기해 선거 기간 내내 큰 논란이 됐다. 선거가 끝난 뒤 선관위는 법률 검토 끝에 국회에 선거법 개정 의견을 제출했다. 특정 정당, 후보자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금지하는 조항 자체를 아예 삭제하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그렇게 되면 투표를 독려할 때도 사실상의 선거운동이 가능해 선거운동이 과열, 혼탁해지는 게 아니냐”는 문제 제기도 나오고 있다.》

○ 선거 기간 내내 문구 편파 판정 논란

선관위는 지난 선거 내내 현수막 문구를 두고 편파 판정 의혹에 휩싸였다. 처음엔 “보궐선거 왜 하죠?” “나는 성평등에 투표한다” 문구를 두고 선관위는 선거에 영향을 주는 행위로 판단해 제한했다. 민주당 소속이었던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범죄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투표가 위선을 이깁니다” “투표가 무능을 이깁니다” “투표가 내로남불을 이깁니다”라는 투표 독려 문구에 대해 선관위가 사용 불가 판단을 내리자 공정성 시비는 극에 달했다. 당시 선관위는 선거법을 근거로 “해당 문구는 국민들도 어느 정당을 지칭하는지 인식이 가능한 표현이기 때문에 사용이 제한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야당은 “선관위가 여당 선거캠프의 팀원이 됐다”고 반발했다.

문제가 된 현행법은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시설물 등에 정당·후보자의 명칭·사진 또는 그 명칭·사진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있으면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선거법 90조)는 조항이다. 엄격하게 기간과 방식 등이 규제되는 선거운동 외에 단순하게 투표를 독려하는 의사표현은 장려하지만, 이것이 사실상의 선거운동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정이다. 따라서 이 조항의 ‘시설물’은 일반인도 게시할 수 있는 것으로 투표 독려용 현수막·피켓이 포함된다.

투표 독려용 현수막 등 시설물은 개수 제한도 없고, 설치 주체도 제한이 없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각 당이나 시민단체 등이 원하는 만큼 더 많은 현수막을 달 수 있는 것. 반면 선거운동용 현수막 등은 해당 지역구 내 동 수의 2배까지 게재할 수 있는 등 엄격하게 개수가 제한되고, 후보자만 걸 수 있다. 예컨대 서울의 경우 424개 동으로 848개의 선거운동 현수막만 내걸 수 있다. 그 대신 허위사실이 아니라면 ‘내로남불’ 등 문구 사용이 가능하다. 이런 제한 때문에 각 정당이나 정치색이 짙은 시민단체들은 투표 독려 현수막을 빙자해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수록 선관위의 부담은 커진다. 투표 독려 시설물의 문구가 특정 정당, 후보자와 ‘유추’되는 정도를 일일이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부 선관위원들이 정치적으로 편중된 이력을 갖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면서 선관위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선관위는 편파 판정 의혹에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촛불혁명 정신 계승! 4월 7일 보궐선거 투표해요!” “민주적인 시장 후보에게 투표합시다” “사전투표하고 일해요” 등 민주당에 유리할 수 있는 문구들도 일일이 심사해 불허 판정을 내렸다는 항변을 한다.

○“내년 대선부턴 ‘유추’ 판단 안 하게 해달라”

여야 모두에서 공격을 받아오던 선관위는 결국 선거가 끝난 뒤 “선거법의 투표 권유 활동, 시설물 설치 등 금지 규정 중 정당·후보자의 명칭·성명을 유추할 수 있는 시설물·인쇄물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부분을 삭제하는 공직선거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선관위 의견대로 선거법이 개정되면 명백하게 특정 정당명이 박힌 현수막이 아니라면 투표 독려 문구를 보고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유추가 가능한지 선관위가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선관위는 정당·후보자의 명칭·성명·사진(그림 포함)을 명시하거나 그 명칭·성명을 나타내는 기호·상징마크·마스코트를 사용한 경우만 걸러내면 된다.

예컨대 지난 재·보궐선거에서 ‘엘시티 보유 논란’에 휩싸였던 국민의힘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자가 연상된다는 이유로 금지했던 “부동산 투기 없는 부산을 위해 반드시 투표합시다” 문구는 선관위 개정안대로라면 허용된다. 하지만 “민생파탄하는 ○○○당을 투표로 심판하자” 같은 문구는 여전히 금지되는 것.

이 밖에도 선관위는 선거기간 동안 일반인도 지지 정당 기호나 후보자 이름이 쓰인 모자나 어깨띠, 윗옷, 표찰, 손팻말 등 소품을 착용할 수 있도록 개정 의견을 냈다. 다만 제작비는 일반인 본인 부담이어야 한다. 일반인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자유롭게 하자는 취지다. 현행 선거법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후보자와 그 배우자, 선거사무장, 선거연락소장 등만 어깨띠, 윗옷 등을 붙이거나 입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 “과열, 혼탁 선거로 번질 수 있다”

선관위가 낸 개정 의견도 실제 현장에선 혼란이 예상된다. 지금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가 유추된다”며 과잉 규제로 비판받았다면 개정 의견안은 반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문구가 무궁무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후보자만 만들 수 있도록 제한된 선거운동 시설물과 흡사한 투표 독려용 현수막, 피켓이 난립할 가능성도 생긴다.

일반인 선거운동 관련 내용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반인에게도 후보자의 어깨띠, 윗옷, 표찰, 손팻말을 허용한다면 적극적인 1인 선거운동이 가능해진다. 정당의 조직력에 따라 선거운동 규모의 차이가 확연히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선관위의 의견안대로 선거법이 개정될지도 미지수다. 소관 상임위원인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관계자는 “선관위가 제출한 의견안에 대한 우려가 많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개정 선거법의 순기능과 부작용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비슷한 내용의 선거법 개정 의견을 2013, 2016년에 냈지만 당시에도 여야가 처리하지 않았다.


#선관위#현수막 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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