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사신과 술잔만 오갔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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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고문헌 천사일로일기
계명대서 국내 첫 번역 마쳐… 정사룡 인품에 반한 明사신
“중국어 건배사 해보시라” 덕담, 당시 외교 뒷얘기까지 담겨

조선 전기 대명외교와 외교 전례를 파악할 수 있는 ‘천사일로일기’의 필사본 원형(왼쪽)과 계명대에서 이를 처음 한글로 번역한 책. 계명대 제공
조선 전기 대명외교와 외교 전례를 파악할 수 있는 ‘천사일로일기’의 필사본 원형(왼쪽)과 계명대에서 이를 처음 한글로 번역한 책. 계명대 제공
16세기 고문헌 ‘천사일로일기(天使一路日記)’가 최근 국내에서 처음 번역됐다. 천사일로일기는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을 맞이한 조선 관료의 일기다. 원접사(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둔 임시 관직) 일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필사본이며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85호다.

이번 번역은 대구 계명대가 진행한 고문헌 번역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계명대는 지난해 7월 고문헌이 학생과 일반에 두루 활용되게 하겠다며 10명의 관련 전공 교수들로 구성된 ‘고문헌 번역 사업단’을 발족했다.

사업의 시작을 알린 천사일로일기는 1537년(중종 32년) 음력 2월 20일에 중국 사신을 의주에서 맞이해 한양까지 온 뒤 같은 해 4월 8일 압록강을 건너서 전송한 기록이다. 조선 조정은 중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는 경우 국경도시 의주에 환영단을 보내 한양까지 오가는 길을 안내했다. ‘천사’(天使)는 명나라가 조선에 파견한 사신을 이른 말이며, ‘일로’(一路)는 지나가는 길이란 뜻이다.

일기를 쓴 사람은 우리 쪽 환영단 책임자인 정사룡(鄭士龍)이었다. 그는 16세기 조선에서 최고로 꼽히는 시인이자 북경 방문 경험이 있어 중국에 밝은 문인이었다. 일기에는 거만하고 까다로웠던 명나라 사신 일행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사룡의 능력과 인품에 매료돼 친밀감을 느끼는 대목이 있다. 2월 25일 일기가 대표적이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두 사신이 웃으며 ‘우리는 날마다 조선말 몇 마디를 배우니, 판서도 중국말을 배우세요. 술 한 잔 합시다라는 말로 오늘부터 중국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아주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원접사가 잔을 잡고 앞에 나아가 중국말로 술 한 잔 합시다라고 하자, 상사가 웃으며 제대로 배우셨어요라고 하였다.”

연구책임자인 김윤조 계명대 한국한문학 교수(62)는 “이 일기는 조선과 중국 사신의 왕래 절차가 상세히 기록돼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며 “두 나라 고위 관료의 인간적 교류는 외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산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계명대는 ‘천사일로일기’와 16세기 문인학자 윤춘년의 문집 ‘학음집’을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10년간 고문헌 27권을 번역할 예정이다. 대상은 1960년대 말부터 계명대 동산도서관에 보관돼있던 고문헌들로, 한 번도 번역된 적이 없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6세기#고문헌#천사일로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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