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뒷날개]독자들이 사랑하는 에세이가 되는 비결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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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에밀리 파인 지음·안진희 옮김/256쪽·1만5000원·해리북스

최근 한국 출판계의 대세는 에세이다. 인문사회 분야 편집자들의 중론이라 최근의 주식 투자 열풍이나 경제경영 트렌드를 반영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렇다. 어떤 에세이가 대세인가.

2018년 출간된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지음·흔)를 예로 들어보자. 제목은 길다. 208쪽이고 가볍다. 저자는 여성이다.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이 에세이가 흥행한 이후 여러 평가가 나왔다. 이야깃거리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라는 긍정적인 반응이 있다. 반면 책에 ‘아무 말’이나 범람한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제기됐다.

이 책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외형적으로 유사하다. 제목이 길다. 256쪽이고 가볍다. 여성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2019년 아일랜드의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됐다. 주요 도서상도 휩쓸었다. 영미권에서도 에세이가 대세라는 걸 증명하는 듯하다.

에세이인 만큼 책이 잘 읽힌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의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아일랜드 더블린대학의 교수다. 알코올 의존증자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썼다. 저자는 “2013년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아빠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고 책을 연다. “우리가 아빠를 찾았을 때, 아빠는 자신이 싼 똥이 만든 작은 웅덩이 위에 몇 시간째 누워 있었다”며 자신과 아버지가 겪은 충격적인 사건을 소개한다.

저자는 이날부터 아버지 병 수발을 든다. 몸과 마음의 고통은 엄청났다. 하지만 건강을 되찾은 아버지는 딸이 자신을 돌봐준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가인 아버지는 일간지에 알코올의존증 회복기를 쓴다. 본인이 알코올의존증자로 산 40년 동안 가까운 사람들에게 입힌 “잔혹한 상처”에 관해서는 전혀 쓰지 않는다. 저자는 “아빠를 동정하기를 오랫동안 거부한 끝에 비로소 나는 내가 상처 주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자신만의 버전으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아버지의 망각을 지적하고, 논쟁한다. 여기서 에세이의 저력이 드러난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이 글을 나와 아빠에 대한 더 커다란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도로 이용할지를 생각했다”는 말엔 저자의 결심이 담겨 있다.

에세이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유력한 형식이다. 여성 저자들이 쓴 에세이엔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 역시 아빠의 이야기로 문을 열지만 불임, 생리, 제모, 이혼, 강간 등을 다룬다. 자기 자신의 매우 사적이고 내밀한 경험으로부터 시작해 오늘날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핵심적인 국면들에 대해 성찰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분노와 사랑, 실패와 행복, 취약함과 강함이 함께 들어 있다. 독자들의 몰입과 지지를 끌어내는 성공 비결은 이 지점이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부 논픽션팀 과장
#뒷날개#에세이#내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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