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정복한 몽골이 강화도를 점령하지 못한 이유는?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입력 2020-12-16 03:00수정 2020-12-1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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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강화도
갯벌로 둘러쳐져 침범 어려워
겹겹 성벽과 방어시설도 큰 도움
강화도는 우리 역사의 주요 순간마다 피란처이자 방어기지로 등장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적을 많이 간직해 ‘역사 전시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막아낸 광성보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의 모습. 동아일보DB
인천 강화군 강화도는 ‘답사의 일번지’, ‘우리 역사의 전시장’ 등으로 불립니다. 유적과 유물이 많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발생한 전쟁들과 강화도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강화도의 지리적 특성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강화도는 본래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가 떨어져 나와 오늘날과 같이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강화도의 동쪽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바다를 염하 혹은 강화해협이라고 부릅니다. 염하는 너비가 그리 넓지는 않으나 조수의 차이가 심하고 물살이 빨라 배가 항해하기 어렵습니다.

강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주요 무대가 되었습니다. 대륙의 유목민족이 쳐들어오면 피란지로 썼고, 해양민족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를 방패 삼아 수도를 방어했습니다. 강화도가 피란지이자 수도 방위의 최전선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강화도는 고려, 조선 시대 수도와 가까웠습니다. 강화도와 개성은 예성강 뱃길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고. 수로 외에도 3가지 경로가 있었습니다. 강화도와 서울은 한강 수로를 통해 빠르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강화는 해상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쌀, 도자기, 특산물 등을 배를 통해 운반했습니다. 조세로 거둔 각종 생산물은 강화도 주변의 바다를 통과하였습니다. 강화도로 피란하면 조운을 통해 계속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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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지리적으로 방어에 유리했습니다. 강화도의 북쪽은 예성강, 임진강, 한강에서 흘러들어오는 퇴적물이 쌓인 습지가 많고, 서해와 맞닿은 서쪽과 남쪽 지역은 조수간만의 차로 넓은 갯벌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동쪽 지역은 염하의 물살은 빠르지만 육지와 가까워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동쪽 지역인 갑곶, 월곳 등에 성벽을 쌓고 방어시설을 구축했었습니다.

○피란의 섬 강화도

강화도가 피란의 섬이 된 시기는 몽골, 만주족과의 전쟁 때입니다. 몽골과의 전쟁 시기 강화도는 38년간(1232∼1270년)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정복하였던 몽골이 고려, 특히 강화도를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첫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강화도는 천연의 요새였습니다. 거기에다가 강화 천도 이후 개성, 서울, 경기 광주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키고, 군대를 이용해 방어시설을 구축했습니다. 궁궐을 짓고 그 주위에 약 2km의 성벽을 건설하고, 해안가에는 외성을 쌓았습니다. 1250년경에는 궁성과 외성 사이에 중성을 건설했습니다. 몽골이 강화를 공격하려면 우선 갯벌을 통과하고 빠른 물살의 염하를 건너야 하며, 그 이후에도 3개의 성벽을 뚫어야 했습니다.

둘째, 고려는 장기전에 대비해 강화도에서 대규모의 간척사업을 벌였습니다. 육지에서 피란 온 주민들을 동원해 대규모의 방조제를 만들고, 방조제 안의 갯벌을 농지로 만들었습니다. 또 조운제도를 이용해 삼남 지방에서 조세를 계속 거두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장기전에 필요한 물자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래도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몽골이 여러 전쟁을 동시에 진행했기 때문입니다. 몽골의 주된 공격 목표는 남송과 서아시아 지역이었고, 고려는 상대적으로 주요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복당하지 않은 측면도 있습니다.

○방패의 섬 강화도

강화도가 역사의 무대에서 다시 주목 받은 시기는 정묘·병자호란 시기입니다. 인조(재위 1623∼1649년)는 만주족(후금, 청)의 침입에 대비해 강화부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는데, ‘유수’란 임금을 대신해서 지킨다는 뜻입니다. 인조는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피란했으나 연미정에서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인조는 병자호란(1636년) 시기에도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대에 막혀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군은 갑곶 지역을 공격해 염하를 건너 강화도를 점령했습니다.

효종과 숙종 시기에 강화도는 다시 군사적 요새가 됩니다. 효종은 즉위 후 북벌정책을 진행하면서 강화도에 진(鎭)과 보(堡)를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숙종 때는 5진, 7보, 8포대(砲臺), 54돈대(墩臺)가 강화도를 톱니바퀴처럼 감싼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강화도 전체가 하나의 성곽처럼 되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강화의 성곽은 이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투(병인양요·1866년)가 정족산성과 문수산성 일대에서 벌어졌고, 최신 병기를 갖춘 미군과의 격렬한 전투(신미양요·1871년)는 초지진, 광성보에서 벌어졌습니다. 1875년에는 일본이 군함을 이끌고 초지진 앞 염하에 나타났습니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포격을 유도했고, 초지진을 지키던 군사들은 자위적 행동으로 일본군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이듬해 다시 나타난 일본군은 이를 빌미로 조선의 개항을 강요해 결국 조선은 일본과 연무당에서 강화도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강화도는 방패 역할을 상실했습니다.

현재 강화도는 통일을 대비하는 섬으로 변화하려고 합니다. 강화도는 북한, 특히 개성과 가까워 교류에 유리합니다. 북한과 합의가 이루어지면 비무장지대(DMZ) 지역인 조강(한강과 임진강의 하류) 지역에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강의 뱃길이 복원되고, 그 뱃길을 이용해 북한과 교류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북 상황이 어려워 꿈같은 이야기지만, 남북관계가 정상화된다면 강화도는 다시 역사의 무대로 등장할 것입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강화도#몽골#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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