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운동화에 끈대신 ‘찍찍이’ 달았더니… 청년층 구매도 늘어

보스턴=임보미 기자 입력 2019-07-27 03:00수정 2019-07-27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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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시니어’ 시대] <2> ‘전연령 친화적’ 상품-서비스가 온다
美 고령화硏 ‘MIT 에이지랩’ 가보니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에이지랩의 ‘아그네스’는 근손실, 관절 퇴화, 당뇨 등 70대 노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신체적 변화를 느끼도록 고안된 장치다. 선반 맨 밑의 물건을 꺼내기 위해 뻑뻑한 무릎을 굽히고, 웬만한 글자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등 고령자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편을 쉽게 알 수 있다. 에이지랩 제공
고령화에는 늘 ‘시한폭탄’ ‘재앙’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뒤따른다. 하지만 고령화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보는 이들도 있다. 미국 보스턴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에이지랩(Age Lab)이 대표적이다. 이 연구소의 설립자이자 ‘장수경제(longevity economy)’의 창시자인 조지프 코글린 교수는 “과거와 다른 요즘 노인들”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인류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고학력의, 자본력을 갖춘 노인이 출현한 적이 있나요? 요즘 미국 시장 구매력의 70%가 50세 이상 인구의 지갑에서 나옵니다.”(코글린 교수)

MIT 에이지랩은 2001년 “새로운 노년층을 위한 기술”을 연구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곳의 연구원 30여 명은 컴퓨터공학이나 산업공학, 인지과학 등 이공계부터 정책, 사회복지, 심리학, 사회과학까지 다양한 분야에 포진돼 있다. 공통점은 달라진 요즘 노인들의 욕구에 관심이 많다는 것. 트렌드에 민감하며 디지털에 익숙한 스마트 시니어는 이들의 공통 관심사다. 이들은 이 같은 연구를 토대로 노인과 고령화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 싶어 하는 기업들에 조언한다.

올해 5월 말 기자가 에이지랩을 찾았던 날에는 미국 보험사 하트퍼드를 포함해 보험 및 금융사 직원 10여 명의 연구실 투어가 한창이었다. 연구실 중앙 세미나룸을 꽉 채우고, 복도까지 늘어선 이들은 에이지랩의 연구 프로젝트 중 하나인 ‘노인의 대중교통 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연구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에이지랩에는 이처럼 매주 2, 3곳의 기업 관계자들이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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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지랩 문 두드리는 글로벌 기업

독일 자동차회사 다임러와 전자전기회사 지멘스, 미국 약국체인 CVS, 스포츠용품 브랜드 뉴발란스, 음료회사 펩시….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글로벌 기업들이 모두 ‘한 수 배우겠다’며 에이지랩을 찾았다. 방문 기업들은 단순 조언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일부는 컨소시엄을 구성해 에이지랩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2005년 개발한 ‘아그네스(AGNES)’는 에이지랩을 대표하는 도구. 영문으로 ‘Age Gain Now Empathy System(노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노화 체험 시스템)’의 약자인 아그네스는 전문 물리치료사 등의 조언을 바탕으로 70대 후반 노인이 경험하는 노화와 만성질환에 따른 불편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아그네스 개발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회사는 다임러벤츠와 지멘스다. 이들 회사는 자신들의 주 고객이 나이 들자, 노년층을 이해하기 위해 에이지랩에 자문했다. 엔지니어, 디자이너, 마케터 등 다양한 집단이 노인에 대한 공감대를 갖게 하기 위해 설문조사나 인터뷰 이상의 것이 필요했고, 그 결과 노인의 경험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아그네스가 개발됐다.

○ 노인 공감 위해 개발된 ‘아그네스’

‘70대의 몸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에 기자 역시 아그네스를 착용해 봤다. 방탄조끼처럼 생긴 약 4.5kg짜리 조끼부터 입었다. 양 팔다리와 손·발목 등에 총 10개의 모래주머니를 찼다. 이어 목과 팔꿈치, 무릎을 두꺼운 패드로 조였다. 근력이 손실된 느낌과 관절 퇴화를 느끼기 위해서라고 했다.

머리에 쓴 헬멧은 어깨의 줄과 연결됐다. 당장 뒷목을 잡고 싶을 만큼 피로했지만 그조차 힘들었다. 손목과 발목에도 각각 허리 부분으로 줄이 연결돼 손을 뻗기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발에는 밑창의 높이가 일정치 않아 균형을 잡기 어려운 슬리퍼를 신었다. 착용을 도와준 서맨사 브래디 연구원은 “노화로 신경이 둔해지면 지표면에 발이 닿는 느낌이 균일하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손가락 관절 퇴화와 촉각 둔화를 체험하기 위한 장갑을 끼고 마지막으로 고글을 써야 했다. 당뇨합병증 등 각종 질환을 가정한 다양한 버전의 고글 중에서 기자는 비교적 무난해 보이는 고글을 골랐다. 녹내장으로 시신경 손상을 가정한 고글이었다. 시야가 현저히 좁아지고 바깥 풍경이 뿌옇게 보였다.

그래도 ‘내 몸은 20대’란 생각에 발걸음을 뗐지만 아그네스의 성능은 꽤 우수했다. 목이 자연스레 굽었다. 길을 걷다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쉽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포스터를 뚫어질 듯 보니 겨우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노인 이해를 높이자 제품이 달라져”

다임러벤츠, 지멘스의 직원들은 아그네스를 입고 차에 시승하거나 자신들의 제품을 사용해보는 것은 물론이고 동작 게임과 레고 조립 등을 했다. 이후 다임러는 차에 타고 내릴 때 허리를 덜 숙일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꿨다. 전자제품의 작은 버튼 때문에 계속 잘못된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좌절’을 경험한 후 지멘스 직원들은 제품의 버튼 배치를 바꿨다.

최근에는 시리얼 및 식품 제조사 제너럴밀스의 직원들도 아그네스를 입었다. 이들의 미션은 ‘아그네스 입고 컵케이크 만들기’. MIT 캠퍼스 맞은편 식료품점에서 선반 꼭대기에 있는 컵케이크 재료를 사온 후 침침한 눈으로 포장 박스에 깨알 같은 글자로 쓰인 조리법을 읽어가며 컵케이크를 만들었다. 이 체험 후 제너럴밀스는 자사 시리얼 박스에 있는 글자의 크기를 확대하고 포장도 더 뜯기 쉽게 고쳤다. CVS 역시 주된 고객층인 고령 소비자들을 위해 리모델링에 아그네스 체험을 반영해 복도의 너비를 넓히고 상품을 빼기 편하도록 배치했다.

에이지랩에서는 ‘85+라이프스타일 패널’을 통해 실제 노인을 만나는 작업도 진행한다. MIT 주변에 사는 85세 이상 노인들은 두 달에 한 번씩 에이지랩을 방문해 상품 디자인이나 최신 기술에 대한 조언부터 건강, 재정 문제, 삶의 의미 등 다양한 노년 삶의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연구소 측은 이들을 통해 노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산업적인 조언도 확장할 수 있다.

기자가 만난 패널 중 한 명인 밥 홀릭 씨(92)는 “다음 세션 때는 다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시피’를 하나씩 가져와 소개하고 영양에 대해 토론한다고 한다. 나는 수프 레시피를 가져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패널로 참여하는 노인들은 사회 참여에 보람을 느낀다. 패널 에드거 클루먼 씨(94)는 이곳에서의 토론을 “좋은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프렌신 그릭먼 씨(88)도 “내가 지금 세상에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은데 연구자들에게 나의 작은 일들이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훌륭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 노인도 편한, 모두를 위한 기술과 디자인

에이지랩에서 요즘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연구 과제는 ‘스마트 리빙’이다. 사물인터넷(IoT), 공유서비스 등 이미 무르익은 기술들을 활용한다면 노인들도 요양원에 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내 집에서 말년을 보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여러 세대가 함께 일할 수 있는 회사에 대한 연구도 추진하고 있다. 평균수명이 늘면서 과거보다 더 오래 일해야 하는 만큼 10대 인턴부터 80대 고령자까지 함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직장의 모습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다. 자율주행차나 인공지능(AI)처럼 신기술과 노인의 삶을 함께 아우르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에이지랩은 ‘노인을 위한 시장’을 위해 노인을 젊은 세대와 다른 특별한 집단으로 구분 짓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코글린 교수 역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노인의 라이프스타일은 미래에 ‘노인’이 될 지금 젊은 세대가 동경하는 형태가 돼야 한다”면서 “모든 연령대 사람들이 사회에 참여하고 사회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전 연령 친화적(age-friendly)’인 사회가 결국 노인에게도 좋은 사회”라고 말했다.


▼“은퇴하고 30년 어떻게 살 것인가”… 조지프 코글린 MIT 에이지랩 교수 인터뷰▼

“고령화 새 모델 없으면 지금 청년층도 30년뒤엔 사회적으로 배제될 것”


MIT 에이지랩 안에 있는 조지프 코글린 교수(58·사진)의 연구실 안은 사방이 포스트잇으로 가득하다. 메모에는 ‘데이터 홈: 주방, 거실, 침실, 주방에서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는?’ ‘고령화시대 의료비 3요소―삶의 질, 의료서비스, 간병’ ‘얼마나 늙어야 늙은 것일까(How old is old)?’ 같은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코글린 교수는 우리가 ‘노인의 삶’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로 단순히 ‘돈 되는 시장’이나 ‘웃어른을 향한 예의’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사회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 사회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으면 지금 젊은 세대 역시 20∼30년 후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게 된다”며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미래는 곧 지금 젊은 세대가 맞이할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때문에 부정적 측면만 강조되는 대다수 고령화 담론에 맞설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노인을 수동적이며 세금을 낭비하는 존재로만 보는 사회가 아니라 예전과 달라진 노인의 가능성을 강조하며 이들이 지속적으로 사회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글린 교수는 “요즘 은퇴는 ‘충분한 노후자금을 마련했는가’만 중요한 게 아니다”라며 “은퇴하고 30년 이상의 시간은 전체 인생에서 3분의 1의 시간이다. 이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처럼 65세에 은퇴하면 많은 이들이 인생 마지막 20∼30년을 일 없이 사회에서 고립된 채 보낼 가능성이 높다”며 “전 생애에 걸쳐 서너 개의 커리어를 이어가야 한다. 특히 노년기에도 집 밖으로 나올 동기가 될 만한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노년기에도 삶의 소소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나이를 먹은 뒤 하는 ‘행사’란 은퇴식과 장례식, 두 개뿐이라는 농담이 있다”며 “젊은 시절 거치는 졸업, 결혼처럼 노년기에도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옮길 때 ‘집 줄이기 파티’를 열거나 소소한 삶의 기쁨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급격한 고령화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해 “초고령사회의 ‘뉴 프런티어(신개척자)’”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학계는 물론이고 산업계, 혁신가들이 주목할 만한 새로운 고령화 모델을 개척할 기회라고 볼 수도 있다”며 “한국이 잘 대처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모방하고 수입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들 고령화를 ‘문제’라고 하지만 언제부터 오래 사는 게 문제가 됐나? 문제는 문제라고 부를 때부터 문제다.”

보스턴=임보미 기자 bom@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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