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p Of Life, 나의 월드컵] ⑧ 최영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여전히 오렌지 쳐다보지도 않는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5월 18일 05시 30분


현역시절 자신이 입었던 대표팀 유니폼 앞에서 포즈를 취한 최영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투지 넘치는 수비로 상대 공격수를 벌벌 떨게 했던 족쇄맨은 1994년 미국 월드컵과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출전을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여기고 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현역시절 자신이 입었던 대표팀 유니폼 앞에서 포즈를 취한 최영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투지 넘치는 수비로 상대 공격수를 벌벌 떨게 했던 족쇄맨은 1994년 미국 월드컵과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출전을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여기고 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뱀탕의 효능을 실감했고 오렌지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나의 월드컵
투지 넘치는 족쇄맨 최영일이 기억하는 1994미국 1998프랑스 월드컵
3000만원 어치 뱀탕에 힘내고 볼리비아전 무승부로 날아간 강남 아파트
1998년 네덜란드 경기 이후 오렌지는 지금도 쳐다보지 않는다
상대와의 경기보다 우리끼리 원팀을 만드는 것이 지금 대표팀이 할 일


최영일(51)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1989년부터 2000년까지 11년의 프로선수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국가대표선수로 활동하는 동안 상대 공격수에게는 항상 부담스런 수비수였다. 투지가 넘쳤고 몸싸움을 특히 잘했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치면 연관검색어로 일본 대표팀의 미우라 가즈요시가 나올 정도로 두 사람이 피치에서 벌였던 전쟁은 한,일 축구팬들에게는 잊지 못할 스토리다. 28살의 늦은 나이에 처음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던 그는 1994년 미국월드컵과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았다. 스페인~볼리비아~독일~네덜란드. 월드컵 본선에서 그가 상대했던 나라다. 수첩을 뒤적이며 20여년 전의 기억을 열심히 되살린 그의 월드컵 추억이다.

대한축구협회 최영일 부회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대한축구협회 최영일 부회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C조 3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던 1994미국월드컵

C조는 독일 스페인이 16강에 진출했고 한국은 2무1패로 조 3위를 했다. 볼리비아가 1무2패로 최하위였다. 한국은 4득점5실점 승점2를 기록해 각 조 3위팀끼리 겨루는 와일드카드에서 최하위인 6위를 차지, 16강행이 좌절됐다. 아르헨티나 벨기에가 승점6위로 와일드카드 1,2위를 미국과 이탈리아가 승점4를 마크해 16강에 나갔다.

-비 오는 순천의 맨땅에서 만들어낸 1994년 월드컵 대표 자리

“당초 대표팀에 내 자리는 없었다. 도하에서 벌어진 최종예선 때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본선을 앞둔 동계훈련 때 2명의 스위퍼(정종선, 박정배)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대타가 필요했다. 소속팀 울산 현대의 전지훈련을 위해 순천에 머무를 때 박경화 기술위원장이 순천으로 선수를 보러 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필 비가 오던 날이었다. 맨땅에서 연습경기를 했는데 평소처럼 쇠 뽕(스터드)이 박힌 축구화를 신고 경기에 나섰다. 상대 공격수들을 다 깔아버렸다. 맨땅에서 내 스파이크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렸을지 생각해보라. 워낙 투지 있게 플레이하니까 대표선수로 뽑아줬다. 울산 현대의 브라질 전지훈련 도중에 대표팀 차출통보를 받았다. 월드컵에 나간다고 브라질 숙소의 사람들이 나를 위해 파티를 열어줬다. 즉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자마자 미국행 비자를 받고 대표팀과 함께 다시 미국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 때 아내가 주위로부터 ‘최영일은 대표팀에 가봐야 땜질용 선수’라고 했다는 얘기를 전해줬다. 그 소리를 들으니 더욱 악에 바쳤다. 그래서 죽기살기로 했다. 결국 박힌 돌을 밀어내고 미국월드컵 3경기 모두 주전으로 뛰었다.”

-주먹구구식 선수분석으로 대회를 준비했던 1994 미국월드컵

“독일에 살고 있던 대표팀 김호 감독님의 친구 분(윤성규 전 삼성 단장)이 가져온 비디오를 보고 전력분석을 했다. 요즘 같은 분석용 화면이 아니라 그냥 경기장면이었다. 그 것을 보면서 선수 각자가 자신이 맡아야 할 선수의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했다. 나는 수비수로서 상대 공격수의 스피드, 헤딩능력, 어느 발을 사용하는지, 헤딩 타점과 어느 지점에서 돌파를 시작하는지를 봤다. 그 선수가 겁이 많은지 여부, 돌파 때 어느 쪽으로 도는지 등도 중점적으로 봤다. 그나마 독일과 스페인은 자료가 있었지만 볼리비아는 자료도 없었다.”

1994 미국 월드컵 독일과의 경기에서 우리나라를 상대로 골을 넣은 클린스만.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94 미국 월드컵 독일과의 경기에서 우리나라를 상대로 골을 넣은 클린스만.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더위와의 전쟁이었던 6월 17일 스페인전, 27일 독일전

“1차전 스페인전, 3차전 독일전이 벌어진 달라스 코튼볼 구장은 평지에 구덩이를 파고 그라운드를 만든 구조였다. 평지에 스탠드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더웠는데 지하의 그라운드에는 바람이 전혀 통하지 않아 찜통 같았다. 유럽의 방송시간에 맞추느라 한낮에 경기를 했다. 얼마나 더웠던지 가수 방실이가 응원을 왔다가 더위를 먹고 쓰러질 정도였다. 그나마 우리는 이런 더위에 익숙했지만 유럽 선수들은 아주 힘들어했다. 스페인전은 기온이 43도까지 올라갔다. 독일전 때도 40도를 넘었다. 이런 상황이라 상대 선수들이 전반전을 마치고 나면 힘들어서 퍼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골을 먹었지만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체력전에는 우리가 유리했다.”

-미국월드컵 때 우리 대표팀의 체력이 상대보다 월등히 좋았던 이유는.

“대회를 앞두고 타워호텔에서 한 달간 합숙훈련을 했다. 이때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3000만원을 들여 체력보강용으로 뱀탕을 해줬다. 순수 국산 뱀이었다. 매일 호텔방으로 선수 1인당 뱀탕 팩 2개씩 넣어줬다. 룸메이트 선배가 뱀탕을 싫어해 그 것까지 다 먹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뱀탕의 효과는 정말 있었다. 대회기간 동안 체력적으로 우리가 지친 적이 없었다. 그 대회 때는 조리사도 동행했는데 덕분에 선수들은 잘 먹었다.”

-2차전 볼리비아전 무승부로 날아간 강남의 아파트.

“와일드카드 제도가 있어서 조 2위가 아니더라도 16강에 올라갈 기회는 있었다. 스페인과의 1차전을 너무 잘해서(2-2로 비김) 볼리비아만 이기면 16강에 간다는 희망이 컸다. 정몽준 회장이 통 큰 베팅을 했다. 16강에 가면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살만한 돈을 모두에게 준다고 약속했다. 선수들이 그 아파트를 꿈꾸면서 볼리비아전에 나섰다. 결국 0-0으로 비기면서 아파트는 날아갔다. 우리가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무실점 했던 경기였다. 2번 결정적인 찬스가 있었는데 골을 넣지 못했다. 누구를 탓할 마음은 없다. 나도 실수할 때가 있는데 누구를 욕하지는 말자는 생각이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다.”

-2-3으로 패했던 최종 독일전에서 아쉬웠던 그 중거리 슛

“클린스만이 2골을 넣었다. 박정배가 마크 전담이었다. 세계적인 선수다운 기량이었다. 공을 살짝 띄워놓고 슛을 하는데 모두가 생각하는 타이밍보다 한 박자 빠른 것이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좋은 공격수는 타고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독일 선수들은 전반에 3골을 넣어서 그랬는지 더위에 지쳤는지 후반들어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3-2로 추격하면서 계속 몰아붙였다. 시간만 더 있으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내게 득점기회가 왔다. 하프라인에서 공을 잡았는데 독일 선수들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오픈찬스가 보여서 중거리 슛을 날렸다. 홍명보가 중거리 슛을 넣은 것도 생각나서 ‘나도 영응이 한 번 되어보자’는 마음으로 때렸는데 상대 골키퍼가 선방했다. 그때 그 슛이 들어갔으면 아마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1998 프랑스 월드컵 한국과 네덜란드의 경기 장면.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98 프랑스 월드컵 한국과 네덜란드의 경기 장면.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E조 4위로 허무하게 끝난 1998 프랑스월드컵

E조는 조별라운드 전체 6경기 가운데 단 2경기만이 승패가 갈렸다. 두 경기 모두 한국이 상대에게 진 것이다. 나머지 경기는 모두 무승부였다. 네덜란드와 멕시코가 조 1,2로 16강에 올라갔다. 한국에게 비긴 벨기에는 3무로 탈락했다. 한국은 1무2패 2득점 9실점, 승점1 조4위로 대회를 마쳤다.

-부상으로 월드컵을 포기할 위기였지만 의지로 이겨내다

“프랑스 월드컵 때는 대표팀 주장으로 참가했다. 대회 4개월 전에 왼 무릎이 돌아가는 부상을 당했다. 영국 전지훈련 중 마지막 경기에서 당한 부상이었다. 수술이나 깁스를 했다면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꼭 본선에 간다는 의지로 재활을 하면서 버텨냈다.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 대표팀 사령탑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선택한 선수가 나였다. 울산 현대시절 3년간 가장 성실하게 열심히 운동한 것을 기억하고 있던 감독의 배려에 감사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했다. ”

-1-3으로 역전패했던 6월 13일 멕시코와의 1차전 숨겨진 이야기.

“하석주의 백태클과 퇴장으로 우리가 선취골을 지켜내지 못하고 3-1로 역전 당했지만 그 결과에 앞서 좋지 못한 일이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마지막 그라운드 적응 훈련 때 사고가 났다. 훈련 마지막 10분 동안 선수들이 각자 몸을 푸는데 수비수 김태영이 중거리 슛 연습을 했다. 하필 그 강한 슛을 이상윤이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다. 기절한 이상윤의 입에서 거품이 나올 정도였다. 다행히 깨어났지만 정상적인 몸은 아니었다. 보통이라면 이상윤 스스로 출전을 포기했을텐데 월드컵 본선이다 보니 출전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트레이너도 몸 상태를 본 뒤 출전이 가능하다는 신호를 줬지만 이상윤은 자기가 경기를 하는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로 뛰었다. 하석주까지 퇴장을 당했으니 우리가 가진 전력의 100%를 발휘하지 못했던 경기였다.”

-6월 20일 네덜란드전 5-0 대패의 기억.

“프랑스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내가 출전했던 경기다. 경기장소가 마르세이유였다. 처음 경기장에 들어설 때는 빈자리가 많아서 몰랐는데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스탠드에 온통 오렌지색만 보였다. 네덜란드 응원단의 열기에 기가 죽었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죽기 살기로 뛰었다. 월드컵은 선수들에게 이적을 위한 중요한 무대인데 그런 동기부여가 있어서인지 네덜란드 선수들은 전반에 2골을 넣고도 전혀 봐주지 않았다. 빠르고 정신이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네덜란드 공격수들의 스크린플레이였다. 상대 공격수를 막으려고 우리가 움직이면 다른 공격수가 와서 교묘하게 막았다. 파울을 하지 않고도 슬쩍 훼방을 놓는 이런 기술은 처음 봤다. 대회를 앞두고 네덜란드 선수들의 경기영상을 보고 분석을 했다. 차범근 감독이 직접 작성한 상대선수의 장단점이 적힌 자료도 봤지만 이런 기술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정말 뭐가 뭔지 모르고 했던 경기였다. 나중에는‘저것들이 인간인가’ ‘혹시 약을 먹고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네덜란드 선수들이 잘 뛰어다녔다. 관중들은 계속 왕왕거리면서 우리를 주눅 들게 했다. 지금도 그 날의 트라우마가 있어 여전히 오렌지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대한축구협회 최영일 부회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대한축구협회 최영일 부회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월드컵 이후 에필로그

-축구인 최영일에게 월드컵이란


“월드컵은 전세계 축구인에게는 꿈이자 로망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공을 잘 차는 선수들이 모이는 무대다. 그 무대가 주는 중압감은 상상 이상이다. 한 번 본선을 다녀오면 그 곳에 내가 갔다 왔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 무대를 통해 내가 살아오는 동안 평생 혜택도 받는다. ‘나는 월드컵 본선을 다녀온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 것을 기분 좋게 생각한다.”

-러시아월드컵 본선을 앞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

“우리 축구는 위기에 더욱 강해지는 DNA가 있다. 지금 한국축구는 위기상황이다. 이럴 때 우리의 숨겨진 DNA를 발휘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상대와 어떻게 싸우느냐는 나중의 문제다. 우선은 우리가 뭉쳐야 한다. 원팀으로 우리가 먼저 단단해진 다음에야 상대 팀이 있다.”

-최영일은 현역시절 상대를 잘 마크해 족쇄맨이라는 자랑스런 별명을 얻었다. 대표팀으로 55경기를 출전한 수비 레전드가 털어놓는 수비수의 역할은 뭘까.

“수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대 공격수와 전쟁을 해야 한다. 수비수는 공격수를 수동적으로 쫓아가는 역할이다. 결국 예측해서 상대의 움직임을 사전에 막거나 최소한 그 선수가 편하게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밀치거나 옷을 잡아당기거나 하여튼 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훼방을 놓아야 한다.”

-최영일은 지난해 11월 대한축구협회 집행부가 됐다. 학원 및 클럽리그를 관장하고 제도개선을 담당한다. 축구행정가로서 최영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정치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에게는 3가지 꿈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중국이 월드컵 본선에 나가는 것. 하나는 월드컵을 중국이 유치하는 것. 하나는 중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라고 한다. 최근 중국에서 만난 축구협회 인사가 들려준 말이다. 우리 정치권도 중국과 대화를 할 때 우리가 가진 축구자산을 많이 이용했으면 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때 박항서 감독이 있으니까 대화가 훨씬 매끄러웠다고 들었다. 중국의 지도자들도 많이 아는 차범근 허정무 홍명보 박지성 등 스타들을 이용하면 한중관계에서 특히 시진핑 주석이 좋아하는 축구를 주제로 많은 얘기를 쉽게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축구대표팀 선수 시절 최영일-미우라 가즈요시(오른쪽).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축구대표팀 선수 시절 최영일-미우라 가즈요시(오른쪽).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 미우면서도 고운 정이 들어버린 최영일과 미우라

최영일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일본 대표팀의 공격수 미우라 가즈요시다. 그는 “게임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불면 ‘또 쟤야’하고 생각하는 순간, 사각형 얼굴의 그 선수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종료휘슬이 나올 때까지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그림자 같았다. 선수생활동안 그처럼 심판 맨투맨 마크를 당해본 적은 예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오로지 최영일 뿐이었다. 그 근성은 대단했고 존경 할만 했다. 귀찮기도 했지만 최영일이라는 선수가 있어서 더욱 투지를 불태울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좋았던 때도 있다”고 했다. 과연 최영일은 미우라와의 질긴 인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와 8강전에서 붙었다. 전반에 후배가 미우라를 마크했는데 골을 먼저 내줬다. 후반전을 앞두고 후배가 ‘대신 막아달라’고 부탁해서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됐다. 미우라는 아버지와 함께 브라질 유학을 다녀온 선수였는데 남미스타일의 역동적인 선수였다. 나쁘게 표현하면 깨작거리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런 스타일에 특히 강했다. 내가 하체는 짧지만 중심이동이 빠르고 잔발이 좋았다. 스피드 있게 툭툭 치고 달리는 스타일에는 약해도 미우라 같은 플레이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넌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고 마크했다. 자신이 있었다. 수비수는 그런 자신감이 중요하다. 미우라는 성격상 몸싸움을 싫어했다. 건들면 반응이 즉각 왔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결국 나 때문에 미우라는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1997년 9월 28일 벌어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일명 도쿄대첩) 때는 일본의 한 방송사가 나와 미우라의 몸싸움만을 따로 찍어서 내보낸 적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일본의 폭력단으로부터 죽이겠다는 협박도 받았다. 아쉽게도 아직 미우라와 따로 만나서 얘기를 해본 적은 없다. 지난해 한일 레전드 매치 때도 기회가 있었는데 성사되지 못했다. 편지는 한 번 주고받았고 기자들을 통해 안부나 얘기는 가끔 전해 들었다. 꼭 한 번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

● 최영일

▲생년월일=1966년 4월 25일
▲출생지=경상남도 남해군
▲출신학교=장산초~동래중~동래고~동아대
▲프로선수 경력=울산 현대~부산 대우~랴오닝 푸순~안양 LG(프로통산 266경기 출전, 3골)
▲국가대표 경력=
1994년~1998년(통산 55경기)
▲지도자 경력=동아대 감독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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