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3년간 “기다려보라” 되풀이… 정권 바뀌자 “국가귀속”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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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역사 점용연장 불허 늑장통보

올해 말 서울 영등포역사 점용 허가 기간이 끝나면서 폐점 위기에 놓인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올해 말 서울 영등포역사 점용 허가 기간이 끝나면서 폐점 위기에 놓인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국토교통부가 올해 말 민자역사(驛舍) 30년 점용 허가 기간이 끝나는 롯데역사(영등포역), 한화역사(서울역 옛 역사), 동인천역사(동인천역)에 국가 귀속을 통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곳에 입점한 소상공인과 근로자들은 일제히 혼란에 빠졌다. 만료 3개월을 앞둔 시점에 기간 연장을 불허한 정부의 ‘늑장 결정’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예고된 혼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현재 전국 민자역사는 15개. 1987년 영등포역 등 3곳을 시작으로 부평(1989년), 부천(1990년), 안양(1992년), 신촌(1997년) 등에 민간상업시설이 들어섰다. 국유 철도부지에 민간자본으로 현대화된 상업 및 역무 시설을 짓는 민자역사는 이용객 편의를 제고하면서도 옛 철도청의 경영을 개선한다는 장점도 있다. 기업은 상업시설을 30년 동안 점유해 운영하는 대가로 국가에 점용료를 낸다. 철도시설공단이 지난해 전체 민자역사에서 받은 점용료는 527억 원이었다.

국유철도 재산활용법은 1992년 개정됐다. 그러면서 기존 사업자의 자동 점용 연장이 불가능해졌다. 정부가 점유 연장이든 국가 귀속이든 결론을 내면 그에 따라 민간업체들이 적용받도록 했다. 서울역 등 법 개정 전에 지어진 역사도 이를 소급 적용받았다는 게 국토부 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정부는 10여 년이 지나도록 이 법을 어떻게 적용할지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한화역사, 롯데역사 등이 3년 전인 2014년 적용 방침을 알려달라고 요구하자 그제야 법 조항을 어떻게 해석할지 내부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그러고는 2015년 7월 2년 반 앞으로 다가온 3개 역사의 처리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맡겼다. 당초 1년 기한 용역이었지만 결과 발표는 없었다. 국토부 측은 “아직 결과가 안 나왔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면서 3년이 흘렀다.

올해 들어 만료 시점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5·9대선’이 끝날 때까지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민자역사 관련 기업 관계자는 “2014년 말부터 실무 임원이 국토부에 여러 차례 찾아가 향후 로드맵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마다 ‘기다려 보라’ ‘선거 결과를 보고 얘기하자’는 식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민자역사 운영업체나 임대 중인 기업들에도 국토부의 연구용역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다. 연장을 할지, 국가 귀속을 할지 알 방법이 없었다.

기업들의 속이 타들어 갔지만 국토부는 법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전세입자도 만기 2년이 다가오면 이사 준비를 한다. 정부의 별도 통보가 없더라도 사업자가 새 입찰 참여나 철수를 준비하는 것은 법적으로 당연하다”고 말했다. 민자역사 운영업체 측이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잘못이라는 얘기다.

정부는 공식 발표가 지연된 것은 민자역사에 입주해 있던 소상공인 대책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명을 내놓고 있다. 귀속한 건물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지도 아직 검토 단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일하 국토부 철도정책과장은 “알짜 입지에 있는 건물인 만큼 경쟁입찰에 참여하려는 유통업체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업자 선정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응찰 업체가 없어 건물이 공실로 남을 우려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정권이 바뀌면서 국토부 입장이 ‘점용 연장’에서 ‘국가 귀속’으로 급선회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문재인 정부가 철도 공공성 강화를 강조하면서 국토부가 특정 민간기업에 혜택을 주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점용 연장을 접었다는 것이다.

실제 2015년 연구용역은 점용 연장에 무게를 두고 진행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국토부 내부 관계자는 “이 용역 진행 상황이 업계에 알려지면서 입점 업체들은 점용 연장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 영등포역 롯데백화점에서 만난 민자역사 입점 상인들은 일터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토로했다. 이달 초부터 백화점에는 ‘롯데가 건물 계약이 끝나 철수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이면 ‘사실이다’ ‘아니다’라며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의류매장 직원 이모 씨(61)는 “설마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까 싶으면서도 가게가 문을 닫을까 봐 불안하다”며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서울역 롯데마트 분위기도 비슷했다. 언론 보도로 소식을 접한 마트 근무자들은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에 바빴다. 농산품 담당 직원 A 씨는 “최근 조회 때 재계약 방향으로 갈 예정이니 동요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비정규직 사원 B 씨는 “일자리 만들겠다던 정부가 몇 천 명의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없앨 거라고 생각하기는 싫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수천 명이 일하는 기업이 문을 닫거나 이전하려면 수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야 한다. 3개월 전에 나가라고 해놓고 ‘새 세입자를 받으면 그만’이라는 식은 너무 가혹하다”고 했다.

이번 혼란이 추후 다른 민자역사에서 재연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경기 부평역은 2019년 말 점용 기간이 끝난다. 재계 관계자는 “앞으로도 기간 만료가 임박할 때까지 기업들이 연장 여부를 알지 못하는 사태가 반복된다면 경영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민지 jmj@donga.com·김배중·천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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