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의 모바일 칼럼] 황교안의 笑而不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7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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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대선 출마 생각 있으신가요?

“…”

-대선 출마 생각 있으신가요?

“…”

-매일매일 혹시 여론조사에서…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이 끝난 뒤 본회의장을 빠져나오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몰려든 기자들의 계속된 질문에도 묵묵부답 발길을 재촉하고 경호원들이 막아서면서 아수라장으로 바뀐다.

황 대행이 본청을 빠져나와 차를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총리님, 혹시 새누리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이나 지도부 만나신 적 있나요?

“…”

-보수를 위해서라도 빨리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

-말할 기회 있을 거라고 했는데, 말할 기회 언제쯤 있을까요?

“…”

-뭐라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새누리당 지도부가 대선주자로 보는데 어떻게 보세요?

“…”

경호원이 다시 “잠시만요. 차 올라옵니다”라며 기자들을 막아선다.

-대선 관련해서 언제쯤 말씀하실 건가요?

“예, 수고들 하세요.”

-입장을 밝힐 계획은 있으신가요? 저희들 계속 총리님 입만 쳐다보고 있는데요.

“허허, (기자의 팔을 가볍게 치며) 적당한 때가 있을 겁니다.”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황 대행은 이 한마디만 남긴 채 차에 올랐다.

요즘 연일 벌어지는 황 대행 주변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판 퇴장 이후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정치권의 계속되는 러브콜에 황 대행은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 그의 미소가 새누리당이나 정통보수를 외치는 이들에겐 ‘살인미소’로 여겨지는 요즘, 보수층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황 대행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황 대행의 요즘 행보는 많은 이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행보에서 행정수반이 아닌 노회한 정치인, 머릿속 계산이 복잡한 정객(政客)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김종필(JP) 전 총리와 오버랩된다. 사실 ‘소이부답’은 JP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도 당시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와의 후보단일화 논의가 한창이던 시절 JP 자민련 총재는 묵묵부답이었다. 계속되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한자로 ‘소이부답’이라 쓰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JP는 “답답하겠지만 기다려. 세상 일이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때 되면 다 얘기할 거니까”라고 기자들을 다독이기도 했고, “옛날에는 말이야”라며 화제를 돌려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늘 뉴스는 언론에 먼저 나왔다. DJP 단일화를 두고 이미 합의 내용들이 흘러나오고 한편으론 합의 결렬설이 흘러나오는 와중에도 JP는 확인도 부인도 않았고, 분위기가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정치는 대개 밀실에서 이뤄지고 언론을 통해 기정사실화될 때까지 모호성과 가변성 속에 온갖 얘기가 춤을 추게 놔두던 시절이었다.

하긴 지금의 정치라고 딱히 달라진 것도 없긴 하다. 반기문 전 총장도 그랬다. 지난해 말 유엔 총장 임기를 끝낼 때까지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맡은 소임에 충실하겠다”고만 했다. 반 전 총장은 “한 몸 불사르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는 귀국해서 대선 행보를 하면서도 명시적으로 대선 출마를 밝힌 적도 없다. 하차하면서도 “순수한 뜻을 접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러니 황 대행에게 왜 출마 여부를 명확히 안 하느냐 탓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최소한 황 대행만은 달라야 한다. 지금 황 대행은 조금이라도 대선 행보로 비쳐선 안 되는 위치에 있다. 국가적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국정농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황 대행에게 대통령 직무를 대행할 책임을 부여했고, 그 책임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을 경우 공정한 대선 관리 책임까지 져야 하는 게 지금 황 대행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심판으로 맡겼더니 선수로 나서고 ‘권한대행의 권한대행’까지 낳는다면 나라꼴은 더더욱 우습게 된다.

지금의 애매한 태도에 대해 황 대행 측에선 “잠재적 대선주자로서 가능성마저 없다면 공무원들에게조차 영(令)을 세우기 없다”는 얘기도 한다지만, 이 얼마나 궁색한가. 지금 공직사회가 얼마나 흐트러져 있는지 반문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런 얘기에 혹시라도 황 대행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딱할 따름이다.

누구라도 대통령 자리에 욕심이 없을 수 없고 지금의 황 대행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큰 꿈을 품었다 할지라도 이번 대선은 아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중대한 고비 때마다 강단 있게 대처하던 황 대행의 모습이다. 정치권과는 명확히 선을 긋고 술렁이는 공직사회를 틀어쥐고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가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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