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적을 베는 무술은 잊어라, 전통무예는 마음을 닦는 수련

조종엽기자 입력 2016-08-27 03:00수정 2016-08-2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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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인…’ 책 펴낸 최형국 박사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이 최근 경기 수원시 화성(華城) 신풍루 인근에서 무예 시범을 보이고 있다. 수원시립공연단 무예 24기 상임연출을 맡고 있는 최 소장은 “20년 넘게 무예를 수련하고 공부해 왔지만 이제 ‘전통 시대에 몸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공부하기 위한 기본 지식 정도만 간신히 터득한 것 같다”며 “앞으로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휴대전화인 갤럭시1하고 갤럭시7은 기능이 천지 차이지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세요. 시대 배경이 1988년, 1994년, 1997년으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소품은 크게 다르지요. 그런데 우리 사극의 무구(武具)를 보면 고려 500년, 조선 500년이 똑같아요. 정통 사극에는 교육적인 역할도 있는 건데,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최근 책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무지와 오해로 얼룩진 사극 속 전통 무예’(인물과사상사)를 낸 최형국 씨(40·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는 개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조선 정조 때 정리된 무예 24기와 전통 맨손 무술인 택견을 수련한 무예인이자 전통 무예사로 국내 1호 박사학위를 딴 ‘문무겸장’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경기 수원시의 무예 전수관에서 만난 그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날래 보였다. 무인다운 풍모 뒤에는 아르바이트로 점철됐던 대학 생활과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에만 5수를 했던 ‘흑역사’가 있었다.

2005년 봄은 그에게 유난히 잔인했다. 벌써 2년 동안 네 번 박사과정에서 낙방했다. 학사, 석사 과정에서 모두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 역사학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건 무리였을까. 수원대 경영학과 94학번인 그는 같은 대학 석사과정에서 마케팅을 공부한 뒤 2003년부터 봄가을마다 각기 다른 대학의 경영, 관광, 체육 전공 대학원 박사과정에 차례로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네 번째로 역사 전공에 지원했지만 관련 전공도,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닌 그를 서울의 한 명문대는 받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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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하라는 뜻인가. 내가 공부를 하겠다는데 세상은 왜 기회를 주지 않나.’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 생계도 문제였다. 당시 10년 동안 무예를 수련했지만 무예를 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선배는 드물었다. ‘전통 무예는 굶어 죽기 딱 좋은 일’이라는 이도 있었다. 무예를 시범하는 행사 아르바이트를 뛰면 갑옷이나 칼 등 무구를 유지할 돈을 제하고 5만 원 정도 남았다.

‘그래도 나는 내 몸 하나만 챙기면 되니 한 달 생활비 25만 원이면 살 수 있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전통 무예를 수련한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최 씨는 대학 1학년 때 ‘탈패’ 동아리에 가입해 호남 동쪽 지역 농악 가락의 하나인 필봉 가락을 치고, 서울 송파산대놀이의 취바리를 연기했다. 탈춤을 추다가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채 수업에 들어가고, 여름에는 짚신을 신는 괴짜 학생이었다. 선배 손에 이끌려 전통 무예 동아리 ‘경당’을 만난 뒤로는 학교에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기행이 하나 추가됐다.

그는 진검을 처음 들어봤을 때의 그 무게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환도를 사려면 60만 원이 필요했다. 쌀 배달 아르바이트가 일당이 셌다. 쌀포대를 지고 연립주택 4층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젊은 허리도 휘청휘청했다. 또 새벽에 벼룩신문을 돌리면 3만5000원을 벌었다. 에버랜드에서 풍물을 치면 조금 더 벌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산 106cm짜리 칼에 검명을 새겼다. ‘청도(靑刀)’였다.

평범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시로 유학온 그에게 ‘내핍 경제’는 익숙했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한동안 자기 방 없이 살았다. 방값을 아끼기 위해 친구들 3명과 함께 방을 쓰거나 그마저도 마땅찮을 때는 한동안 학교 내 자치 공간에서 몰래 잤다. 어떤 겨울에는 후배에게 ‘이 겨울만 나겠다. 나를 멀리하지 말라’며 석 달을 얹혀 지냈다.

어찌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2001년 경영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지만 생계와 무예, 공부 사이의 갈등은 계속됐다. 좋아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조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학부 시절인 1999년 경기 수원 화성에서 열린 ‘정조시대 전통무예전’이라는 행사에서 무예 24기 공연을 연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예로 먹고살아 보자. 근처에는 마침 수원 화성이 있지 않은가. 내가 수련한 무예 24기는 화성을 지키던 장용영 군사들이 익혔던 것이다. 화성에 무예 24기라는 콘텐츠를 결합해 관광 자원으로 만들면 인기가 있지 않을까.’

2002년 월드컵 경기 식전 행사를 그가 연출한 무예 24기 공연이 장식했다. 무예로 ‘전통무예를 활용한 관광마케팅 전략’이라는 석사 논문도 썼다. 그가 연출하는 화성 신풍루 앞 무예 시범은 2003년 주말 상설로, 2004년부터는 평일 상설로 확대됐다.

2003년에는 ‘365일 중 360일’을 승마장에서 말을 탔다. 마상무예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태풍이 오던 날 말을 타러 나가자 관리인이 ‘미친 ×’이라며 “죽든 말든 내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고 타라고 했다.

“마상무예는 말의 역할이 60∼70%입니다. 무기를 들고 타니 보통 말은 놀라거나 자빠져 나가지요. 먼저 말을 순치해야 해요. 옛날에 말을 어떻게 훈련시켰나 사료를 찾아보니 달랑 한 줄 나와요. 그렇게 1년여 말을 타고 수련생들을 가르쳐 2004년 마상무예 오픈 시범을 했지요.”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본격적으로 무예 전수와 공연만 할 것인지, 아니면 박사과정에서 관련 공부를 더 할 것인지는 여전히 고민이었다. 체육학을 공부하려다가 ‘무예와 전쟁의 역사를 이해해야 무예를 가능한 한 올바른 형태로 복원할 수 있겠다’ 싶었다. 대학원에 계속 떨어지는 동안 무예서를 독학했다. 한학을 익힌 수원의 선생들에게 모르는 부분을 한 줄 한 줄 물었다.

‘5수생’인 그를 받아준 곳은 중앙대 역사학과다. “막상 합격하니 좋기는 한데 더 두렵더군요. 전공 수업을 듣는데 혼자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제가 역사에 완전히 깡통이잖아요. 학사 석사에서 역사를 공부한 이들을 따라가기에는 턱도 없었죠.”

그때부터 ‘논문을 씹어 먹듯이’ 공부만 했다. 하루에 무예, 군사, 역사 관련 논문 4, 5편을 읽었다. “1970년대 쓰인 논문은 토씨만 빼고 다 한자예요. 단어도 되게 어려워요. ‘포폄(褒貶·옳고 그름, 선악을 판단해 결정함)’이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처음 봤죠. 자전의 설명이 무슨 뜻인지 몰라 국어사전을 또 보기도 했어요. 박사 7년은 정말 ‘암흑기’였죠. 하하.”

2011년 가을 박사 논문 ‘조선 후기 기병의 마상무예 연구’가 통과됐다. 시기별로 달라지는 마상무예와 정치 사회에 대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실전성이 강조돼 둥근 표적을 쏘던 기사(騎射)가 짚 인형을 쏘는 것으로 바뀌죠. 또 전투마가 대량으로 필요해지니 말 관련 의학서가 나오고 마의(馬醫)가 군영에 배치되는가 하면 좋은 말을 청나라에서 수입해 왔죠.”

전통 무예를 전공한 역사학 박사는 최 씨 뒤로도 찾아보기가 극히 힘들다.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오래전 지방 풍물패 전수장에서 만났던 여성과 결혼도 했다. 화성 행궁에서 올린 결혼식에서는 무예 24기 시범단이 칼과 창을 휘두르며 축하 시범을 했다. 시범단은 수원화성운영재단, 수원문화재단 소속을 전전하다가 지난해 수원시립으로 전환되면서 생활도 안정됐다.

“조선이 무예를 천시했다는 건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코드로, 잘못된 인식입니다. 양반 자체가 문반과 무반을 가리키는 말이잖아요. 지금까지는 정치사와 문인 위주로 연구되면서 무예와 무인에 대한 연구는 소홀했어요. 전통문화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무인의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최 씨는 역사와 무예에 관해 ‘조선 무사’를 비롯해 6권의 책을 냈다. 공저를 더하면 9권이다. 사극과 영화 각각 서너 편, 다큐멘터리 10편 이상에 무예, 군사 분야에 대해 조언했다. 올 초 세워진 해군사관학교의 이순신 장군 동상의 갑옷과 무기에 대해 조언했고, 경남 통영에 새로 세워지는 장군 동상도 고증할 예정이다.

그에 따르면 드라마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날이 곧은 환도를 쓰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날이 곧은 환도는 삼국시대에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곡선으로 휜 환도가 사용됐다.

사극에 나오는 무기와 무예는 왜 오류가 많을까.

“제작진에 조언하면 그때는 알았다고들 해요. 한데 그게 실제 소도구 담당에게는 전달이 안 돼요. 그러다가 막상 ‘쪽대본’과 촬영시간에 쫓기면 ‘그냥 그것 가지고 찍어’라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고려 갑옷을 조선 중기 무인들이 입는 이른바 ‘갑옷 돌려쓰기’가 벌어지는 거지요.”

최 씨는 조선왕조실록 기존 번역본도 무예에 관한 오역이 적지 않다고 한다. “편곤(鞭棍)으로 짚 인형을 때리는 무예를 편추(鞭芻)라고 해요. 편곤은 도리깨와 비슷한 무기인데 ‘채찍 편’자만 보고, 이를 ‘채찍으로 짚 인형을 때리는 무예’라고 번역했습니다. 안타깝죠.”

그는 우리 전통 무예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크다고 했다. 전통 무예는 ‘우리 방식으로 몸을 이해하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궁(國弓)에서 쓰이는 ‘발이부중(發而不中)이면 반구저기(反求諸己)’라는 말을 예로 들었다. 활을 쏘아서 맞히지 못했으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남 탓 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더 갖추라는 얘기다.

갑옷을 입고 선 최형국 소장. 사극 속 장군의 모습과 달리 투구 아래 목과 귀를 보호하는 ‘드림’을 묶은 것이 눈에 띈다.
“전통 무예는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인격 완성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소위 ‘신체에 대한 군사화’가 이뤄집니다. 학교에서 5무도라고 해서 사격 유도 검도 총검술 등 군사체육을 가르쳤지요. 그렇게 왜곡된 무예는 요즘에는 서양식 체육이 대체해 ‘경쟁을 통한 선의의 리더십’을 가르치지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우리 전통의 몸에 대한 인식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최형국#전통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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