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이 편지를 받으신다면 제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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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6·25 발발 66년]참전미군 故 리처드 페이 ‘부치지 않은 편지’ 뒤늦게 공개

제가 어머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이 편지를 받으시게 된다면 그건 제가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일 겁니다. 어머님, 이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총을 정비하고 분대원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1952년 7월 23일 전투 현장에서 쓴 리처드 페이의 편지 일부
제가 어머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이 편지를 받으시게 된다면 그건 제가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일 겁니다. 어머님, 이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총을 정비하고 분대원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1952년 7월 23일 전투 현장에서 쓴 리처드 페이의 편지 일부
“어머님, 사랑합니다. 제가 어머님을 많이 사랑한다는 것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게 된다면 그건 제가 다시는 어머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일 겁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1952년 7월 23일 개성 근처 전투 현장. 리처드 페이(당시 20세)의 손이 빨라졌다. 어림잡아 1분에 500발의 포탄이 주변에 떨어지고 있었다. 주춤했던 북한군 3000여 명이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몇 시간 뒤에는 적이 총공격을 퍼부어 아군의 위치가 노출될 것”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군종장교가 곧 그의 편지를 받으러 올 것이다. 사실상의 유서였다. 어머니에게 가급적 많은 글을 남기고 싶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머님, 이제 다시 준비하러 가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제 총을 정비하고 분대원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날 그가 목숨을 잃었다면 이 편지는 어머니에게 보내졌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썼던 이 편지는 3년간의 파병 생활을 마친 뒤 1954년 귀국할 때 돌려받았다. 죽음을 앞두고 느낀 가족에 대한 사랑을 그는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다.

이 편지는 2004년 페이가 별세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따 똑같이 리처드라고 이름 지은 아들이 집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이 편지는 미 해군 예비역 대령인 아들이 2015년 한미 연합 군사연습인 키리졸브에 참가할 때 한국 해군 통역장교인 서정대 중위에게 전달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 중위는 이 애틋한 사연을 본보에 제보하게 됐다.

다른 6·25전쟁 참전용사들처럼 아버지도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가족에게 다 말해주진 않았다. 아들은 “한국의 겨울이 정말 춥다는 것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게 평생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란 것은 수도 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1952년 6월 개성 인근에서 군복무 중이던 아버지 리처드 페이 씨. 당시 스무 살이던 해병대 청년은 전투 직전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이 유서는 2004년 해군 예비역 대령인 첫째 아들이 뒤늦게 발견해 최근 한국군에 전달했다. 리처드 페이 씨 제공
1952년 6월 개성 인근에서 군복무 중이던 아버지 리처드 페이 씨. 당시 스무 살이던 해병대 청년은 전투 직전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이 유서는 2004년 해군 예비역 대령인 첫째 아들이 뒤늦게 발견해 최근 한국군에 전달했다. 리처드 페이 씨 제공
1932년생인 아버지는 미 해병대에 입대해 1951년 겨울 산악전 훈련을 받은 후 1952년 초 한국으로 파병됐다.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기도 했고 편지에 쓴 내용처럼 적군의 포위로 숱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1978년 판문점에서 한국전쟁종군기장을 받았고 1995년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쟁기념관 개관식에도 참석했다. 아버지는 당시 “개관식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행진한 것이 내 인생 중 가장 감동스러운 순간이었다”고 가족에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과의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아버지가 1975년 일본 나고야국제학교 사무차장으로 부임했을 때였다. 8세짜리 재일교포 정홍준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아들은 “홍준이는 우리의 5번째 형제였고, 지금도 그의 아이들과 사촌처럼 어울리고 있다”고 말했다.

해병대였던 아버지 페이 씨의 영향을 받아 딸 1명과 아들 3명 등 자식 4명이 모두 해경 또는 해병대에서 근무했다. 아들은 역시 대를 이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87년부터 2015년까지 팀 스피릿, 키리졸브, 을지프리덤가디언 등 한미 연합 연습에 8번이나 참가했다. 미국 정부에서 한국훈련 참가기간이 총 60일 이상 되면 수여하는 한국방위근무기장을 받았다.

아들은 “1987년 처음 부산에 왔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고 말했다. 그가 탄 배의 함장은 “김치는 냄새가 나니 먹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용기 내어 먹어 본 김치는 정말 맛있었다.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김치를 꼽는다. “사촌 부인이 한국 출신이어서 덕분에 맛있는 김치를 자주 먹을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아들은 요즘 6·25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휴전선부터 남쪽까지 도보로 걸으며 아버지와 한국을 느껴 볼 생각이다. 처음에는 서해안부터 동해안까지 휴전선을 따라 걸어가려 했지만 전쟁의 아픔과 한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에서 남까지 걸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30년 동안 지켜본 한국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의 변화, 한국군의 현대화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19세 군인부터 제독까지 모두 친절한 것이 인상 깊었어요. 한미동맹 구호인 ‘같이 갑시다’만큼 둘 사이를 잘 표현한 말이 없는 것 같아요. 제게 한국은 친근하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6·25#참전미군#리처드 페이#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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