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의 법과 사람]이어령의 뒤통수를 때린 참용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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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수석논설위원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이어령 선생은 천재다. 1934년 충남 아산에서 났다. 올해로 82세. 양주동 박사(1903∼1977) 이후 거의 유일무이한 국보급 천재다. 양주동은 생전 술이면 술, 글이면 글, 말이면 말로 ‘국보 제1호’였다.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영문학자, 번역문학가, 수필가였다. 비공식 통계지만 양주동은 그 시대 TV나 라디오에 나와 가장 말을 많이 했고, 가장 많은 글을 썼다.

이 시대 이어령이 그렇다. 여든 넘은 나이에도, 수술하고 건강에 이상이 온 지금도 여전히 양주동처럼 박학강기(博學强記)를 뽐낸다. 내가 이어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7, 8년 전 인연이 맺어진 서영은 작가를 통해서다. 이어령이 이화여대 교수를 하면서 1972년부터 14년간 월간 문학사상 주간을 할 때 서영은이 이어령을 모셨다.

몇 년 전 서영은이 나를 불렀다. 이어령 선생을 모시고 점심을 하는 자리였다. 기라성 같은 문단의 원로급부터 중진 작가 10여 명이 있었다. 나도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령 선생이 조금 늦게 와 착석했다. 그때부터 마이크를 아마 90% 독점했다. 나도 어디 가도 꿀리지 않고 구라를 피울 줄 안다. 그런데 그날 나는 평생 처음 짧게 두세 번밖에 말하지 못했다.

나의 영원한 대부(代父) 최인호가 몇 차례 이어령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갔을 뿐이었다. “승옥이 형(‘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의 작가 김승옥), 요즘 어떻게 지내?” 2003년 뇌중풍으로 쓰러진 여파로 말이 어눌해 필담으로 ‘충무공 이순신에 관심…’이라고 쓴 종이를 보여줬다. 그때 이어령은 다시 “임란 때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이라며 해박한 지식을 한껏 과시했다. 놀라웠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최인호 대부에게 나중에 물어봤다. “왜 그랬냐고.” “다 좋으신데 너무 마이크를 독점하셔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엔 압도당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지만.

며칠 전 이어령을 같은 모임에서 봤다. 근데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지 마이크를 겨우 60%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다. 그가 건강하게 100세 넘게 오래오래 살아 보석 같은 체험담을, 깊고 풍부한 지혜를, 번득이는 예지를 후배들에게 많이 나눠주길 진심으로 빈다.

그날도 그는 나에게 보석 하나를 선물했다. 문화부 장관 때 일이었다. 외무부에서 유엔본부에 전시할 각국의 문화재를 모집할 때였다. 어떤 문화재로 할지는 문화부의 소관이다. 그런데 외무부에서 제멋대로 신라금관으로 정하고 레플리카(복제품)를 전시하기로 한 뒤 노태우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문화부에 사후 통보했다.

이어령 장관은 보고를 받은 뒤 불같이 화를 내고 외무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을 뒤집은 전례가 전무했다. 할 수 없어 이 장관이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노 대통령에게 요모조모를 설명했다. “신라금관 모조품은 사이즈가 작아 눈길을 끌 수 없다. 오히려 88올림픽 때 사용한 용고(멕시코 큰 소의 가죽으로 만든 대형 북)나 월인천강지곡 목판인쇄본을 확대 복사하는 것이 훨씬 나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노 대통령은 바로 외무부 장관을 찾아 “나 노태웁니다. 이어령 장관 생각대로 하세요”라고 지시했다. 아마 대통령 재가가 난 사안을 뒤집은 첫 사례일 것이다.

이어령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는데 뒤통수에서 대통령의 말이 들려왔다. “이 장관, 혹시 저의 좌우명을 아시나요. 참용기입니다. 참자 용서하자 기다리자. 그렇게 평생 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이 장관이 얼굴이 붉어져 돌아보는데 ‘물태우’라 불리던 노 대통령이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tao4@donga.com
#이어령#서영은#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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