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수]덕남이의 3저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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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수 경제부 차장
김상수 경제부 차장
신기했다. 가수 이문세가 부른 ‘소녀’는 나온 지 31년 됐다. 그런 노래가 지금 히트를 치고 있다니….

덕남이는 지난 주말 한강시민공원을 산책하다 깜짝 놀랐다. 음악을 듣기 위해 스마트폰을 뒤적였는데 인기순위 1∼5위를 ‘흘러간 노래’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응팔)’ 삽입곡이었다. 10대 아이돌이 판치는 시대에 20∼30년 전 노래들이 뜨고 있다니 희한한 일이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헤드폰에서 감미로운 ‘소녀’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한강공원 벤치에 앉았다. 가만히 강물에 떠 있는 철새들을 바라보다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1988년. 그가 대학 캠퍼스를 처음 밟은 해였다. ‘아, 그때는 정말 좋았는데….’ 정말 그랬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정치는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행복했다. 저유가, 저금리, 원화 약세의 이른바 ‘3저(低) 호황’이 있었다. 유가는 배럴당 13.21달러(두바이유 기준)에 불과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 100% 원유를 수입하던 한국은 원자재 가격 하락의 덕을 톡톡히 봤다. 제조업으로 먹고사는데 생산비용이 낮아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원화 약세라는 날개까지 달아 수출이 잘됐다. 기업들은 돈 빌리기도 쉬웠다.

기업들이 돈을 잘 버니 개인 소득이 늘어났다. 기름값도 싸고 이자 부담이 덜해 소비가 늘었다. ‘돈의 선순환’이 이뤄진 것이다. 돈이 넘쳐 증시와 부동산 시장도 폭발했다. 1987년 500 선 안팎이었던 종합주가지수(코스피)가 1988년 900 선을 돌파했다. 전년보다 상장종목 수와 시가총액이 60% 늘었다. 역대 한국 증시에서 이런 호황이 없었다. ‘개미(개인투자자)’란 말도 이때 처음 나왔다. 1988년 경제성장률은 무려 11.9%. 믿기지 않는 수치였다.

덕남이 같은 1980년대 학번은 취직 걱정도 몰랐다. 신입사원 10명 중 9명이 정규직이었다. 덕남이 친구들은 입사할 때 좋은 직장을 맘먹은 대로 골랐다.

이제 28년이 흘렀다. 88학번 덕남이는 직장생활 22년 차 중년이 됐다. 강산이 세 번 변할 시간이 지난 뒤 다시 ‘3저 시대’가 왔다. 유가는 배럴당 30달러 선이 깨졌다. 환율은 달러당 1200원 선을 넘었다. 기준금리는 연 1.5%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3저는 한국 경제에 최악의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유가는 끔찍하다. 한국 대표업종인 조선과 건설이 죽을 맛이다. 유가가 곤두박질치니 세계 각국의 석유개발 프로젝트가 중단되면서 원유를 시추하는 해양 플랜트 수주가 뚝 끊겼다. 최근 몇 년 사이 해양 플랜트 사업은 국내 3대 조선사 매출의 절반이었다. 유가 하락으로 중동지역 건설 경기가 꺼지면서 국내 건설사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기름 나오는 신흥국들 경기가 나빠지자 이들 국가로 수출길이 막혔다.

원화 약세도 수출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중국, 일본, 유럽 등 한국의 수출 경쟁국들도 잇따라 자국 화폐 가치를 낮춰 원화 약세로 기대된 가격경쟁력 제고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세계 경기 침체가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다.

유가와 금리가 낮으면 소비가 느는 게 정상인데 국내 시장에선 오히려 지갑이 꽉 닫혔다. 주거비, 사교육비에 대한 부담과 늘어난 가계 빚 때문이다.

휴∼. 답이 안 나온다. 덕남이는 먹고사는 게 급하지만 나라가 어찌 굴러갈지도 걱정이다. 정치인들은 만날 싸우고 있고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만 한다. 실제로 괜찮아서 그런 건지, 공포감이 확산될까 봐 그런 건지 모르겠다. 덕남이는 벤치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아이고, 응팔도 끝나고 이제 뭔 재미로 사나.’ 볼을 때리는 강바람이 찼다.

김상수 경제부 차장 ssoo@donga.com
#응팔#저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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