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62주년]밴 플리트 장군이 극찬한 ‘백마고지 전투’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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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간 24번 뺏고 빼앗겨… “화력 넘은 정신력의 승리”

밴 플리트 장군의 지시로 미 육군이 작성한 백마고지 전투 사후검토보고서 표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밴 플리트 장군의 지시로 미 육군이 작성한 백마고지 전투 사후검토보고서 표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에서 치른 전투 중 ‘백마고지(395m) 전투’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그는 6·25전쟁 중에 이 전투에 대한 연구를 미 육군에 지시하고 미 제9군단 작전처는 사후검토보고서(AAR)를 작성해 전 미군 부대에 배포했다. 미군이 치른 전투가 아닌 한국군이 승리한 백마고지 전투를 밴 플리트 장군이 눈여겨봤던 것은 승리는 화력이 아닌 정신력이 이끈다는 교훈을 백마고지 전투가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개 사단이 강원 철원군 북쪽의 요충지를 놓고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간 치른 전투다.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판문점에서 열린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이었다. 고지의 주인이 무려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지만 결국 우리 군이 방어에 성공한다.

중공군은 6·25전쟁을 기록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저항해 북한을 지원했다는 뜻) 전쟁 경험 총결’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철원평야 지대를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서울 및 후방에서 이어지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가 통과하는 곳이었다. 아군과 적군 모두에 중요한 요충지였다.

중공군은 10월 6일 저녁 이곳에서 기습 공격을 개시했다. 기습 공격과 동시에 아군의 후방 쪽에 있던 봉래호의 둑을 파괴해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국군의 증원과 군수 지원을 차단한 것으로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지를 지키고 있던 국군을 몰살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철원평야 일대는 적에게 절대 뺏겨서는 안 되는 곳임을 알고 있었기에 9사단 장병들은 총알이 떨어지면 적을 물어뜯어서라도 물리쳤다. 적 기관총에 전우들이 쓰러지면 자신의 몸에 폭약을 두르고 적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3416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공군은 무려 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한동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밴 플리트 장군은 미군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라고 판단했다. 그랬던 그에게 백마고지 전투는 더없는 모범사례였다. 미 육군의 사후검토보고서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한국군이 보여줬던 ‘사전불퇴(死戰不退)’, 즉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정신이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는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혁혁한 전과를 인정받은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베트남전 파병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베트남으로 이동해 닌호아 뚜이호아 깜라인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백마고지 전투#밴 플리트 장군#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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