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태원]국회의 ‘봄날’도 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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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정치부 차장
하태원 정치부 차장
국무총리, 외교통상부 장관, 주미 한국대사, 유엔총회 의장, 대통령비서실장, 서울대 교수, 국회의원(3선)…. 대통령 빼고는 안 해 본 것이 없다는 한승수 김앤장법률사무소 고문에게 최고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단연 국회의원”이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200여 개에 이른다는 ‘알토란’ 같은 특권도 특권이지만, 국민의 대표라며 고관대작(高官大爵), 왕후장상(王侯將相), 천하재벌을 민의의 전당에 소환해 쩌렁쩌렁 호통칠 수 있는 마법의 완장을 찰 수 있으니 그 어떤 자리가 부러우랴.

2012년 5월에는 국회선진화법이라는 신형 무기까지 장착해 소수당이 사실상 모든 법안을 결재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기형적 토양까지 만들었다. 극한적인 대립을 피하고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생의 정치를 펼치겠다는 취지였는데 여의도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정치권 짬짜미 구조의 강화로 귀결되는 분위기다.

입법권의 강화는 일반적인 추세다.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할 만한 몇 안 되는 헌법기관인 만큼 의회정치의 강화와 발전은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국민의 눈에는 주체할 수 없이 커져버린 입법권력에 취해 통제력을 상실한 국회와 의원들이 보여주는 추악한 ‘갑(甲)질의 향연’만 크게 보인다.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60개 법안 중 연말정산 추가 환급을 위한 소득세법 개정안 등 달랑 3건만 처리해 놓고 ‘네 탓’ 공방에 날 새는 줄 모르는 것이 우리 국회의 민낯이다. 힘을 제어할 능력은 없는데 몸집만 비대해진 지적 미숙아가 됐기 때문에 초래된 필연적 비극이라는 혹평도 나온다.

위헌요소가 있어도 표에 도움이 되면 두 눈 딱 감고 처리해 버리면서도, 자기 지역구나 본인의 이해에 반하는 법안이라면 모든 의사일정을 중단시키는 한이 있어도 결사 저지다. 뉴타운 재정비를 위한 도시정비법 개정안 19건이 난립하면서 3년 넘게 공방만 벌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 1년에 1만 건 넘게 발의되는 의원입법안 중 상당수는 동료 의원이 낸 법안 표절이고, 전(前) 회기에 발의됐던 법안을 자구만 살짝 바꿔 내놓는 경우도 허다하다.

행정부와 사법부의 권능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 월권 논란도 빈번하다. 정부가 올해 성안해야 할 국가철도망 구축계획도 의원들의 민원예산이 폭주하는 바람에 ‘일단 스톱’ 해야 할 상황이란다. 두 달 넘게 대법원이 기능을 발휘하건 말건 청문권을 가진 국회는 나 몰라라다.

개인적으로 만난 국회의원들 중에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식견도 탁월하고 투철한 공직관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집단으로서의 국회는 십중팔구 정파적 이익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부도덕한 집단이 되고 만다. 정치가 본래 사악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멀쩡한 사람도 예비군복만 입혀 놓으면 X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예비군복이 주는 익명성에 숨어서 무책임한 일탈을 자행하는 것처럼 사회적 질타와 조롱의 대상이 된 국회의원직(職) 자체가 일말의 양심이나 신념에 초강력 최면제를 살포하는 그런 현상….

결국 스스로 바꾸지 못하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 개혁을 강요받는 것은 역사의 진리다. 국회를 해체해야 한다는 절규를 극단론으로 흘려 넘겨서는 안 된다.

국민의 대표가 될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입법부 내에서 스스로 걸러내는 자정(自淨) 기능이 작용해야 한다. 국민의 표로 선출한 선량(選良)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검증의 무풍지대에서 유유자적하는 시대는 계속될 수 없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입법부는 국민의 신뢰를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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