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외교실세 유네스코 급파… 韓은 大使 없이 임시대표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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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징용현장 ‘근대화 세계유산’ 될판]
‘과거사 왜곡’ 외교戰 밀리나

‘지옥섬’ 악명 높은 탄광지역 군함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군함이 떠있는 것 같아 ‘군함도’란 
별명이 붙은 하시마 섬의 모습. 야구장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작은 섬이지만 질 좋은 석탄이 풍부해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113명(최대 약 800명)이 강제로 석탄 채굴에 동원됐다. 조선인들은 해저 700m 탄광에서 하루 12시간씩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 하시마 섬을 ‘지옥섬’이라 불렀다. 아사히신문 제공
‘지옥섬’ 악명 높은 탄광지역 군함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군함이 떠있는 것 같아 ‘군함도’란 별명이 붙은 하시마 섬의 모습. 야구장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작은 섬이지만 질 좋은 석탄이 풍부해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113명(최대 약 800명)이 강제로 석탄 채굴에 동원됐다. 조선인들은 해저 700m 탄광에서 하루 12시간씩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 하시마 섬을 ‘지옥섬’이라 불렀다. 아사히신문 제공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 전쟁이 유엔의 교육과학문화 분야를 총괄하는 유네스코(UNESCO)로까지 번지고 있다.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의 한(恨)과 피가 서린 일본 내 산업시설들이 가해자인 일본의 어두운 역사가 빠지고 자신들의 근대화 역사만을 담은 채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경우 과거사 왜곡을 둘러싼 외교 전쟁에서 한국이 또 한 번 밀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현재 파리 유네스코 한국대표부는 발칵 뒤집힌 상태다. 2013년 일본이 신청한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 28곳에 대해 ‘유네스코가 한국 입장을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해 거의 손을 놓고 있다가 2주 전 유네스코의 전문가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심사 결과 등재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자 허를 찔렸다는 반응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전문가 그룹의 사전 심사를 통해 △등재(inscribe) △보류(refer) △반려(defer) △등재 불가(Not inscribe) 등 4단계로 권고를 내린다. 등재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총회에서는 별 이견이 없는 한 원안대로 통과시킬 확률이 80∼90%에 이른다. 한국은 앞으로 총회(6월 28일)가 열리기까지 석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투표권을 가진 21개 회원국 대표들을 상대로 치밀한 외교적 설득 작업을 벌여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유네스코 한국대표부 지도부는 공백 상태다.

전임인 이상진 대사가 이달 중순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대사직을 사직한 뒤 귀국한 상태이며 공사도 2월 말에 귀임했다. ‘문화·외교 전쟁’을 펼쳐야 할 수장들이 현장에 없는 것이다. 한국 외교부는 23일 부랴부랴 최종문 외교부 장관특별보좌관을 ‘유네스코 협력대표’로 파견했다. 파리 유네스코 한국대표부 관계자는 “ICOMOS는 다음 달 15일까지 공식적인 발표 전에는 심의 결과를 대외비로 하고 있다”며 “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문화외교 협력을 맡아줄 임시 대표가 부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준비는 치밀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최근 실세 외교관인 사토 구니(佐藤地) 씨를 유네스코 일본대표부 특명전권대사에 임명했다. 그는 내달 초 부임할 예정이다. 2013년 6월 여성으로서는 일본 외무성 사상 처음 국장급(외무 보도관)에 발탁된 사토 대사는 아베 정권의 핵심 정책을 대내외에 알리는 중책을 맡아 왔다. 유럽연합(EU) 일본 정부대표부 공사, 제네바 국제기관 일본대표부 공사를 거치는 등 국제기관을 상대해 본 경험도 풍부하다.

일본은 지난 수십 년간 유네스코에서 막강한 문화 외교력을 행사한 나라이기도 하다. 1999년 동양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마쓰우라 고이치로(松浦晃一郞) 사무총장을 수장으로 배출했다. 마쓰우라 사무총장은 10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탄탄한 네트워크를 쌓았다. 일본은 유네스코의 막강한 돈줄까지 쥐고 있다. 유네스코 예산 분담금이 10.834%로 2위(2014년)이다. 22%로 1위인 미국이 지난 4년간 분담금을 안 내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1위 국가이다. 이런 요인들을 고려해 볼 때 향후 총회에서 한국 편을 들어줄 나라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당초 일본 정부는 이번에 올린 지역의 기독교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할 것을 검토하다 산업시설로 변경했는데 여기에는 아베 정부의 의중이 크게 반영되었다는 관측이 많다.

유네스코는 어떤 유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한 나라에 머물지 않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197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인류의 보편적 정서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 한 역사학자는 “일본이 등재를 추진하는 유산들은 본래 메이지시대 제철, 조선, 철강, 석탄 관련 시설이 나중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거치며 군수산업으로 전용되면서 강제징용 등 제국주의 팽창의 죄악이 저질러진 곳”이라며 “강제 징용만을 내세워 등재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아우슈비츠처럼 일본이 어두운 역사를 함께 인정하도록 설득해 나가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유네스코#징용#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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