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백약이 무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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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교육부가 대학수학능력시험 개선 방안을 내놓자 학생과 학부모들이 또 술렁이고 있다. 교육부는 몇 달간 밤을 새워 가며 대책을 만들었다지만 현장의 반응은 매번 같다.

일단 “또 바꾸냐?”는 불만이 튀어나온다. 이어 “교육부 공무원들은 자식도 없냐?”, “높은 사람들은 다 애를 외국에서 키워서 한국 교육 실정을 모르나 보다”라는 레퍼토리가 이어진다. 끝내는 “차라리 교육부를 없애라”로 마무리된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입시 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울화통이 치밀 때가 많다. 현재 고등학생들이 1, 2, 3학년 모두 다른 수능을 치러야 하는 현실을 보면 폭동이 안 나는 게 신기하다 싶다.

입시 제도가 바뀔 때마다 사교육이 꿈틀거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에다 불안한 마음까지 얹어지니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그런데 이런 무한 경쟁 체제를 과연 교육부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어째 개운하지 않다.

얼마 전 고등교육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과 모인 적이 있다.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대입 과열 문제로 집중됐다. 각국의 대학 체계에 정통한 이들은 선진국의 예를 들며 입시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우리도 정말 공부하고 싶은 애들이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입학한 뒤에도 관심사에 따라 전공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게 해야 하며, 졸업은 어렵게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상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대학의 서열이 너무나 뚜렷하고 학벌 사회의 폐단이 큰 이 땅에서는 대학을 쉽게 가게 한다면 수능 응시생 65만 명이 모조리 서울대로 몰릴 지경이다. 자율형사립고의 입시 경쟁을 없애겠다며 서울시교육청이 도입한 추첨 정책을 대입에 적용하면 어떨까. 분명 추첨 학원, 추첨 모의평가, 족집게 추첨 강사가 생길 것이다.

입시 지옥의 근본 원인은 입시 정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 교육 정책을 배운다며 핀란드니 독일이니 찾아다녀 봤자 우리나라에 이식하기는 어렵다. 임금 구조와 직업관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대학, 그것도 그럴듯한 대학을 나와야만 먹고살 만한 일자리를 가질 확률이 높다. 오늘날의 학부모들에게는 자녀가 12년 동안 입시 지옥에서 시달리는 ‘현실’보다 남은 평생을 88만 원 세대로 살지 모른다는 ‘미래’가 극한의 공포감을 준다. 대학을 안 나오면 시집, 장가조차 가기 어려운 풍토에서 자녀를 입시 경쟁으로 몰아넣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매달 수백만 원을 버는 육체 노동자보다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박사가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세상에서 누가 대학 졸업장을 포기할 것인가.

독일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학문의 길을 갈지, 직업 교육을 택할지 정해 그에 맞는 학교로 진학한다. 독일 학부모들이 교육열이 없거나 자녀들을 방치해서가 아니다. 대학을 가지 않아도 안정적인 임금을 보장받고 사회적으로 차별받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는 재수가 조금씩 줄고, 일찌감치 마이스터고나 특성화고에서 미래를 찾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고 고학력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대학 나와 봤자 소용없다”는 비관론이 커진 탓이라는 분석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임금 구조가 선진화되고 사농공상(士農工商) 식의 직업 귀천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입시 정책은 백약이 무효일지 모른다. 교육부만 탓하기가 찜찜한 이유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수능#사교육#입시#마이스터고#특성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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