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후손들 “정의가 존중받는 나라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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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96돌-광복 70돌]숭고한 희생… 고통 속에 남겨진 가족들

지난달 27일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만난 조명하 의사의 아들 조혁래 씨(왼쪽)와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안창열 의사의 손자 안상문 씨(오른쪽)가 일제강점기와 건국 초기 겪었던 삶의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지난달 27일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만난 조명하 의사의 아들 조혁래 씨(왼쪽)와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안창열 의사의 손자 안상문 씨(오른쪽)가 일제강점기와 건국 초기 겪었던 삶의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무자비한 일제 강점 치하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거리낌 없이 목숨을 내던진 선열의 숭고한 희생이 있어서였다. 그 어떤 가치보다 존중받아야 했다. 하지만 광복 직후 일어난 6·25전쟁과 급격한 산업화는 독립운동에 나섰다 희생된 열사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까지 외면하게 만들었다. 광복 70주년과 ‘3·1 만세운동’ 96주년을 맞이한 올해 독립운동 1, 2, 3세대는 한목소리로 “경제적 보상도 중요하지만 독립운동 역사와 유공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 영광스러운 희생…남겨진 가족의 고통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4월 1일 충북 음성군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군의 총탄에 숨진 독립운동가 안창열 의사(1881∼1919)의 손자 안상문 씨(77). 안 씨는 “증조부께서 정3품 벼슬을 해서 유복했지만 조부께서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다 썼다”고 말했다. 안 의사 순국 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안 씨의 조모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객지 생활 때문에 안 씨의 부친도 병을 얻어 20대에 사망했다. 안 씨는 “1945년 학교에 들어갔는데 일본인 선생이 독립운동가 후손이란 이유로 모질게 매질했다”고 회고했다.

안 씨가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받은 건 1980년. 그전까지 안 씨는 청소차 운전, 막노동을 하며 힘겹게 생계를 유지했다. 안 씨는 “처음 보상금을 받은 게 월 1만 원 정도였고 지금은 월 150만 원 수준”이라며 “그나마 내가 죽으면 아무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독립유공자 손자·손녀 중 대표 1인만 보상금을 지급받고 수급자가 사망하면 다른 가족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안 씨는 “여동생도 힘겹게 살았지만 여동생이 받은 보상은 하나도 없었다”며 미안해했다.

○ 늦었고 부족했던 국가의 지원

1928년 5월 14일 대만 타이중에서 일본 히로히토 왕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일본군 육군 대장 암살을 시도한 조명하 의사(1905∼1928)의 외동아들 조혁래 씨(89)도 독립운동가 후손 대우에 아쉬움을 표했다. 조 씨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는 조 씨 일가를 감시했고 조 씨는 학교에서도 일본인 교장과 교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다 광복을 맞이했고 고향인 황해도 송화군은 북한 정권이 장악했다. 조 씨는 “인민군에 끌려갈 위기를 수차례 넘기고 간신히 남한으로 피란을 와서는 1963년에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생계를 꾸리려고 온갖 일을 해야 했다”고 기억했다. 그나마 조 씨와 안 씨의 상황은 나은 편이다.

현재 보훈처의 전체 보훈 대상자 85만7011명 가운데 독립유공자는 1만3930명으로 약 1.6%를 차지한다. 광복회가 추산하는 독립운동 참가자 300만 명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다.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 김시명 회장은 “6·25전쟁을 겪으며 광복 전 순국하신 분들은 자료가 없어지는 등 업적을 증명하기 어려워 보상이 늦어지거나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활실태는 지금까지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다. 조명하 의사 기념사업회 조영환 사무국장은 “자수성가 아니면 지인들의 도움으로 삶이 정상화된 경우가 있을 뿐 국가 지원으로 기반을 닦은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 존경받는 사회 돼야

이들은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이 대우받고 존경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40년 대구사범학교에서 비밀 결사조직 ‘다혁당’을 만들었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5년간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이주호 씨(95·부산 동래구)는 “올바른 행동을 하면 당사자나 그 후손은 고생한다는 게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점”이라며 “바르게 살면 존경받고 대접받는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고 말했다. 1923년 1월 12일 일제 압제의 상징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의사(1890∼1923)의 외손자 김세원 씨(68)도 “이 나라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라고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민들이 독립운동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 조 씨는 “유명한 몇몇 의사 외에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기억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건혁 gun@donga.com·정윤철 / 부산=황성호 기자
#독립투사 후손#독립유공자#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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