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일제 강점 치하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거리낌 없이 목숨을 내던진 선열의 숭고한 희생이 있어서였다. 그 어떤 가치보다 존중받아야 했다. 하지만 광복 직후 일어난 6·25전쟁과 급격한 산업화는 독립운동에 나섰다 희생된 열사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까지 외면하게 만들었다. 광복 70주년과 ‘3·1 만세운동’ 96주년을 맞이한 올해 독립운동 1, 2, 3세대는 한목소리로 “경제적 보상도 중요하지만 독립운동 역사와 유공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 영광스러운 희생…남겨진 가족의 고통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4월 1일 충북 음성군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군의 총탄에 숨진 독립운동가 안창열 의사(1881∼1919)의 손자 안상문 씨(77). 안 씨는 “증조부께서 정3품 벼슬을 해서 유복했지만 조부께서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다 썼다”고 말했다. 안 의사 순국 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안 씨의 조모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객지 생활 때문에 안 씨의 부친도 병을 얻어 20대에 사망했다. 안 씨는 “1945년 학교에 들어갔는데 일본인 선생이 독립운동가 후손이란 이유로 모질게 매질했다”고 회고했다.
안 씨가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받은 건 1980년. 그전까지 안 씨는 청소차 운전, 막노동을 하며 힘겹게 생계를 유지했다. 안 씨는 “처음 보상금을 받은 게 월 1만 원 정도였고 지금은 월 150만 원 수준”이라며 “그나마 내가 죽으면 아무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독립유공자 손자·손녀 중 대표 1인만 보상금을 지급받고 수급자가 사망하면 다른 가족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안 씨는 “여동생도 힘겹게 살았지만 여동생이 받은 보상은 하나도 없었다”며 미안해했다.
○ 늦었고 부족했던 국가의 지원
1928년 5월 14일 대만 타이중에서 일본 히로히토 왕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일본군 육군 대장 암살을 시도한 조명하 의사(1905∼1928)의 외동아들 조혁래 씨(89)도 독립운동가 후손 대우에 아쉬움을 표했다. 조 씨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는 조 씨 일가를 감시했고 조 씨는 학교에서도 일본인 교장과 교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다 광복을 맞이했고 고향인 황해도 송화군은 북한 정권이 장악했다. 조 씨는 “인민군에 끌려갈 위기를 수차례 넘기고 간신히 남한으로 피란을 와서는 1963년에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생계를 꾸리려고 온갖 일을 해야 했다”고 기억했다. 그나마 조 씨와 안 씨의 상황은 나은 편이다.
현재 보훈처의 전체 보훈 대상자 85만7011명 가운데 독립유공자는 1만3930명으로 약 1.6%를 차지한다. 광복회가 추산하는 독립운동 참가자 300만 명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다.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 김시명 회장은 “6·25전쟁을 겪으며 광복 전 순국하신 분들은 자료가 없어지는 등 업적을 증명하기 어려워 보상이 늦어지거나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활실태는 지금까지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다. 조명하 의사 기념사업회 조영환 사무국장은 “자수성가 아니면 지인들의 도움으로 삶이 정상화된 경우가 있을 뿐 국가 지원으로 기반을 닦은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 존경받는 사회 돼야
이들은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이 대우받고 존경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40년 대구사범학교에서 비밀 결사조직 ‘다혁당’을 만들었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5년간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이주호 씨(95·부산 동래구)는 “올바른 행동을 하면 당사자나 그 후손은 고생한다는 게 우리 사회의 잘못된 점”이라며 “바르게 살면 존경받고 대접받는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고 말했다. 1923년 1월 12일 일제 압제의 상징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의사(1890∼1923)의 외손자 김세원 씨(68)도 “이 나라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라고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국민들이 독립운동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 조 씨는 “유명한 몇몇 의사 외에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기억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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