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누가 대통령에게 ‘된다’고 말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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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장
박중현 경제부장
2년 내내 무척 궁금했다. 2013년 초 박근혜 정부 출범을 준비하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임기 중 총 134조6000억 원 규모의 복지 확대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할 때 이 막대한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고한 이들이 누구였는지.

그때부터 최근까지 현 정부 정책의 흐름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고위 인사에게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듣고 의문이 풀렸다. “대선 공약을 만든 교수들, 보고하러 들어온 고위 공무원 중에 대통령에게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당시 인수위는 복지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으로 증세(增稅)를 제외한 세 가지를 꼽았다. 정부 지출 구조조정과 지하경제 양성화, 비과세·감면 축소 등이었다. 인수위는 ‘할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선 의문이 제기됐다. “저게 가능한 일이 아닌데….”

정부 지출을 줄인다는 게 말이 쉽지 대부분 경직성이어서 1∼2% 깎기도 힘들다는 게 예산을 짜 본 공무원들의 설명이다. 새로운 복지 정책을 도입하면서 지출을 줄이는 건 더 어렵다. 국회의원들이 선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지역 예산을 줄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정부 지출은 해마다 늘고 있다.

20∼30%의 경제가 지하에 묻혀 있다며 고소득 전문직, 자영업자에게서 세금을 싹싹 걷겠다던 계획도 현실과 동떨어지긴 마찬가지였다. 탈세한 사람들한테서 걷어 좋은 데 쓰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이 있겠느냐만 이게 생각만큼 큰돈이 안 된다. 세금 폭탄 맞느니 사업을 접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간 문 닫는 룸살롱, 의원, 주유소가 속출한 이유다. 이미 1999년 신용카드 소득공제, 2005년 현금영수증제 도입으로 한국의 지하경제는 바닥이 드러난 우물이었다. 결국 정부는 작년 하반기부터 세무조사 강도를 대폭 늦췄다.

연말정산 사태에서 확인된 것처럼 비과세·감면 축소를 통한 재원 확보는 거센 저항에 좌초하기 십상이다. 교과서적으로 봤을 때 증세가 아니라고 정부가 아무리 우겨도 월급 토해 내는 회사원들에겐 씨알도 안 먹힌다.

대선 공약을 만든 사람들, 인수위에 불려 들어가 실행 계획을 만든 고위 공무원들이 이런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공약을 만든 이들은 여야가 복지 공약 규모를 경쟁적으로 키우는 대선 과정에서 ‘일단 이기고 바로잡으면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당선 후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넘치는 대통령 앞에서 말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영혼이 없다고 비판받는 공무원들의 영혼 밀도가 제일 희박해질 때가 바로 정권 교체기다. 곧 취임할 대통령 앞에서 직(職)을 걸고 ‘안 된다’고 할 만큼 간 큰 공무원은 드물다.

그럼 대통령은 정말 가능하다고 믿었을까.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뢰하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다들 ‘된다’고 하는데 주변의 비판에 휘둘려 괜히 의심하며 국민과의 약속을 깰 사람이 아니다. 그 결과 국민은 요즘 뒤늦게 날아든 복지 확대의 청구서를 받고 공짜를 바란 대가가 어떤 건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최근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지자 청와대와 내각의 최고위 정책 당국자들은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정책을 조율하기 위해 정책조정협의회를 신설했다. 건강보험료 개편 백지화 등 최근의 정책 난맥을 바로잡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건 협의회나 위원회가 아니라 박근혜 레이저를 견뎌 내며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정직한 인물 한두 명이다. 지금까지 안 되던 일이 앞으로 가능할지 걱정하는 국민에게 “청와대에 찾아가서라도 대화하겠다”는 탈박(脫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취임 일성이 그나마 다행스럽게 들린다.

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복지 확대#대선 공약#증세#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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