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연수]러시아는 누구 편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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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수 논설위원
신연수 논설위원
“대북 삐라(전단)를 뿌리면서 대화하자는 게 말이 되나? 당신들이라면 국가 원수를 모욕하는 삐라를 뿌리는 나라와 대화하고 싶겠나?”

모스크바에서 만난 러시아 정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사이에 대화가 안 되는 것이 한국의 잘못 때문이라는 투다. 기자는 ‘한-러 대화’ 포럼과 한국언론진흥재단 행사의 하나로 지난주 러시아를 방문했다.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 지 24년이 됐지만 러시아의 정치 외교 관계자들은 남북한 관계와 동북아 평화에 대한 생각이 한국과 딴판이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대화에 나서도록 러시아가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는 우리 측 당부에 그들은 “한국과 미국이 내건 6자회담 조건이 너무 높다. 미리 핵을 포기하면 6자회담을 뭐 하러 하나? 조건을 낮춰 일단 대화에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답했다.

“남북 대화가 진전되지 못한 것은 북한이 약속을 어기고 핵 개발을 강행했기 때문”이라는 우리 측 주장에 대해서는 “북한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라”는 충고(?)가 날아왔다. “세계 최강인 미국과 한국이 수시로 대규모 연합군사훈련을 한다. 군사훈련에는 북한 폭격과 평양 상륙 작전도 포함돼 있다. 북한이 두렵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들은 올해도 미국과 한국이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했지만 북한이 감탄할 만한 자제력을 발휘해 4차 핵실험을 하지 않았다며 북한을 감쌌다.

러시아인들이 보기에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이 지역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군비 확장이다. 한 안보전문가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는 북한이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북한의 위협에 비해 지나치게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 동북아에 군비 감축과 평화 구축을 위한 다자협상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신문에 나는 것은 꺼렸다. 러시아가 북한뿐 아니라 한국과의 관계도 중시한다는 의미다. 현재 러시아의 상황을 보면 이해가 간다. 경제를 석유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러시아는 유가 하락으로 최근 1년간 루블화 가치가 절반으로 폭락했고 경제성장률은 0%대로 곤두박질쳤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의 경제 제재가 더해져 제2의 외환위기설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현실 인식은 다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러시아도 평화와 경제발전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 남북한을 오가며 사업을 한다는 기업인은 “핵 개발은 잘못됐지만 북한을 궁지와 고립으로 몰아가는 것도 잘못이다. 평화를 위해선 북한이 자기 방식대로 서서히 변할 수 있도록 한국이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한-러 경제교류가 활발해지기를 바랐다. 블라디미르 야쿠닌 러시아철도공사 사장은 “이번에 남-북-러 3각 협력사업인 나진-하산 물류 프로젝트를 지지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1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남-북-러 3각 사업을 제안했지만 그동안 진전이 없었다. 나진-하산은 한국 정부가 승인한 첫 번째 사업”이라며 한국의 소극적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갈루시카 극동개발부 장관은 “북한도 가스관과 철도 연결에 참여하겠다고 했다”면서 “한국이 말만 하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고 재촉했다.

러시아는 광복 직후 북한 정권을 세웠지만 1990년대 초반엔 한국과 더 가까웠던 ‘천(千)의 얼굴’을 가진 나라다. 남북통일과 동북아 정세에 큰 영향력을 가진 러시아가 북한 편만 든다면 한국 외교는 실패한 것이다. 러시아와 신뢰를 돈독히 해 우리 입장을 설득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해 국익에 활용하는 유연함이 아쉽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대북 삐라#러시아#북한#경제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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