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중현]‘密旨인사’가 정치금융 만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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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장
박중현 경제부장
“다 짜여 있던 건데요 뭘. 혹시 바꿔볼 수 있나 하는 기대가 없진 않았는데…. 윗선에서 밀어줄 정도로 훌륭한 분이니 잘하시겠죠.”

5일 오후 우리은행 행장후보추천위원회(행추위)가 후보 3명을 면접한 뒤 곧바로 이광구 개인고객본부 부행장을 차기 행장으로 내정하자 탈락한 후보 중 한 명은 이렇게 푸념했다.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멤버인 이 부행장은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비선(秘線)실세들의 암투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터진 ‘정치(政治)금융’ 논란의 주인공이다.

비판여론이 휘몰아치면서 그 며칠 전부터 인선 절차가 중단될 수 있다는 금융권의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내정 전날 동아일보 취재진은 이 부행장 내정을 강행하려는 분위기를 감지했다. 정부 고위관계자가 “윗선의 의사가 워낙 굳건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예전 ‘관치(官治)금융’의 인사와 확연히 달라진 정치금융, 혹은 신(新)관치의 핵심이다. 금융기관 최고경영자(CEO) 인사를 앞두고 청와대나 정권의 몇몇 최고 실력자일 것으로 막연히 짐작만 가는 이른바 ‘윗선’의 밀지(密旨)가 내정설이 도는 개인과 비(非)관료 출신으로 정권 창출에 참여했던 소수의 금융계 인사에게 전달된다. 이 인사들은 해당 금융회사에 이 메시지의 내용을 알리고, 행추위 등 인선조직은 어디에선가 날아든 이름을 추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관료조직은 이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철저히 소외된다.

‘이런 이유로 이 사람이 돼야 한다’는 부연설명이 없다 보니 밀지를 내린 사람과 천거된 당사자만 그 이유를 안다. 출중한 실력과 경력 때문인지, 권력실세와의 친분 덕인지, 특정 지역 출신이거나 운 좋게 잘나가는 대학에 다닌 덕인지 고위관료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추측만 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온갖 설(說)들이 만들어져 시장에 유포된다. 이렇게 자리에 오른 금융권 인사들에겐 퇴임할 때까지 그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말로 대변되던 관치는 오래전부터 한국 금융권의 고질병으로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관치 인사 때에는 정치권력과 모피아 그룹의 협의 과정이 있었다. 장관들도 상당한 결정권을 행사했다.

관치금융 시절에도 특정 인사 내정설이 수시로 돌았지만 여론의 향배 등에 따라 바뀔 여지가 있었다. 내정자의 문제점이 드러났을 때 정치권이 추천한 인물이라면 관료조직이, 관료가 천거한 경우라면 정치권이 서로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과정이 사라졌다. 윗선이 밀지를 내린 의도를 확인할 채널도 막혀버렸다. 현 정부 들어 청와대에서 일했던 고위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적은 많아도 대통령에게 전화해본 적은 없다”라고 말한다. 대통령에게 밀지의 진위를 확인하기 쉽지 않은 구조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선 과정에 문제가 생겨도 윗선이 스스로 의사를 거둬들이지 않는 한 밑의 사람들이 인사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또 메시지 전달자가 사심(私心)을 갖고 적당히 자기 생각이나 민원을 끼워 넣어도 누구도 알아챌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9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부정부패를 예방하려면 먼저 정부 내 업무 시스템이 더욱 투명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최노믹스’ 구조개혁의 시험대로 금융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한국 금융권을 개혁하고 투명성을 높이려면 왕조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밀지인사’부터 사라져야 한다.

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관치#인사#우리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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