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정훈]방탄조끼 잔혹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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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사회부장
김정훈 사회부장
1998년 7월 23일쯤 있었던 일이다. 7, 8월이면 여야를 불문하고 국회의원들이 너도나도 온갖 명목으로 해외 유람을 떠나 국민의 눈총을 받던 시절이었으나,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때 아닌 한여름 임시국회를 단독 소집했다.

당시 정치부 기자였던 필자가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사무실에서 하순봉 원내총무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속내는 뻔히 알고 있었지만 ‘왜 임시국회를 소집했느냐’고 묻자 그는 “솔직히 말해 국회가 문을 닫고 있으면 우리 당 의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것 아니냐. 방탄조끼라도 입고 있어야지”라고 답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투로 멋쩍어하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전해 대통령선거에서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져 야당 신세로 전락한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서 김대중 정권으로부터 무슨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이 유달리 컸던 때였다. 대기업 임원 출신인 모 의원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단식농성을 하고 있기도 했다.

하 원내총무의 발언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더니 여당인 당시 국민회의에서 ‘한나라당이 소집한 임시국회는 방탄국회’라고 비난하는 논평을 냈다. 이렇게 해서 ‘방탄국회’란 말이 탄생했다.

방탄국회가 소집됐든, 또는 동업자끼리 똘똘 뭉쳐 무산시켰든 15대 국회부터 18대 국회까지 16년간 국회에 제출된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은 31건 중 단 1건만 통과됐다. 그 사이 방탄국회는 불체포특권을 악용한 것이라는 지탄을 받아 왔다.

여야가 뒤바뀌다 보니 방탄국회의 원조였던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이 이젠 방탄국회를 맹비난하고, 방탄국회를 비난했던 국민회의-민주당의 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번엔 방탄국회를 여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영장심사에 출석하긴 했지만 한동안 잠적한 새누리당의 박상은 조현룡 의원은 야당이 소집한 방탄국회에 숨는 ‘원조 방탄당’ 출신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방탄국회의 수법도 교묘해지고 있다. 사흘간의 국회 소집 공고 기간에 따른 회기 공백을 하루라도 줄이기 위해 야밤에 국회 소집을 요구하고, 본회의 처리를 무산시키기 위해 법원의 영장심사 연기를 요청하는 ‘꼼수’들까지 등장한 것이다. 법의 틈새를 노린 이런 꼼수를 막기 위해선 우선 여야가 ‘특권 내려놓기’의 일환으로 국회법 26조의 ‘체포동의안이 본회의에 보고된 때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표결해야 한다’는 조항부터 고쳐야 한다. 2005년 신설된 이 조항은 신속한 체포동의안 처리를 위해 시한을 정해 놓은 것이지만 다음 본회의 일정을 의도적으로 잡지 않아 체포동의안을 자동 폐기시키는 틈새가 노출된 만큼 ‘본회의 보고 즉시 표결해야 한다’로 고쳐야 한다.

야당의 전유물이 된 방탄국회를 두고 검찰 내부에선 “야당 의원 수사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푸념이 나온다. 한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야당 의원 수사를 할라치면 ‘야당 탄압’ ‘표적 수사’라 비난하고, 영장을 발부 받아도 국회나 당사에서 농성을 해버리면 잡아오지도 못하고 골머리가 아팠다”고 했다. 여권으로부터도 ‘야당을 잘 달래서 협상테이블에 간신히 끌어들였는데 판 깨는 짓이나 한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고 토로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지만,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인 우리 국회는 욕을 먹어야 정신을 차리는 이상한 국회가 돼버렸다. 방탄국회에 이어 장외투쟁까지 10여 년 전 그 모습 그대로인 데칼코마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훈 사회부장 jnghn@donga.com
#방탄국회#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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