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서정보]피해자 가족을 위한 매뉴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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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보 사회부 차장
서정보 사회부 차장
대통령의 사과도 무위였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냉소마저 깃들어 있었다. 일부 유가족은 “그런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라고 일축해 버렸다.

피해자 가족들이 정부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피해자 가족들의 불신은 국민의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사고 자체보다 정부의 대응에 대한 비난이 더욱 커진 형국이다.

사고 다음 날인 17일 전남 진도체육관에 찾아간 대통령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공직자들이 제대로 못하면 다 물러나게 하겠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대통령의 말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은 분노로, 분노는 불신으로 이어졌다. 대통령의 엄명에 공무원들도 잘하고 싶었겠지만 우왕좌왕 어쩔 줄 몰랐다.

피해자 가족들이 구조가 늦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만 되풀이하거나 뒷북 대책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절망과 분노에 빠진 가족들은 정부가 제대로 보살펴 주지 않고 방치한다고 여긴다.

이번 사태로 명확해진 건 대형 사고 때마다 지적돼 온 사고 예방 매뉴얼, 구조 매뉴얼만큼 피해자와 그 가족을 위해 정부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세밀하게 다룬 매뉴얼이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진행됐어야 했다.

피해자 가족 전담팀이 우선 가족 현황을 정확히 파악한다. 가족을 대표할 대표단을 구성하게 한다. 이래야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을 방문했을 때 엉뚱하게 피해자 가족도 아닌 지방선거 예비후보가 마치 가족대표인 양 사회를 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어 가족별로, 혹은 두세 가족을 묶어 전담자를 1명씩 둔다. 꼭 공무원일 필요는 없다. 충분히 훈련받은 자원봉사자를 평소에 확보해 사고가 나면 즉시 투입한다. 이들은 가족이 요구하는 것, 알고 싶은 것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고 1차적 심리 상담으로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이들이 가족의 1차 소통창구가 되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 전달되는 요구 사항은 전담 공무원팀이 처리한다. 이들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권한을 갖고 지휘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조치가 가능한 것은 현장에서 처리하고 시간이 걸리는 건 충분히 상황을 설명하고 기다리게 한 뒤 답을 준다.

구조 상황은 현장에 가장 밀접한 사람, 가능하면 직접 구조를 지휘하는 사람이 브리핑하게 한다. 홍보용으로 숫자를 부풀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설명한다. 지금처럼 조류 등으로 구조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상황을 이해시키고 현장에서도 직접 보여준다. 최근 구조책임자 격인 해군 중령의 설명에 피해자 가족이 박수를 치는 일이 매일 벌어져야 하는 것이다.

현장을 떠난 가족도 지속적으로 돌본다. 이번 사고와 같이 시신이 일찍 수습돼 원래 사는 곳으로 돌아가면 해당 지역의 자원봉사자나 공무원이 인계받아 다시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한다. 정부가 부랴부랴 심리지원단을 만들었지만 고작 2시간 교육받고 가족들을 상대하게 하는 방식으론 아무 도움이 안 된다. 한 주민센터가 희생자 가족을 오라고 한 뒤 10분 남짓 형식적 상담만 했다는 보도를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이는 극히 일부분의 예시에 불과하다. 매뉴얼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피해자 측의 울분과 불신이 크게 줄지 않았을까. 또 피해자 가족이 슬픔을 딛고 새로운 삶의 힘을 얻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됐을 것이다.

서정보 사회부 차장 suhchoi@donga.com
#세월호 참사#피해자 가족#대통령#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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