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현미]‘깜깜이 투표’에 속지 않으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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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한 동네에서 꼬박 37년을 살다 보니 선거철이 돌아올 때마다 재탕 삼탕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다. 며칠 전 건물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 속의 얼굴이 낯익었다. 우리 지역에서 구의회 의원을 지낸 분인데 이번엔 구청장 후보란다. 구청장만 두 번째 도전이고 2년 전에는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 그런데 이분의 화려한 공직 도전의 역사만큼이나 그때그때 당적(무소속까지 포함)도 달라졌다. 공천해 주는 곳이 곧 소속 정당인 셈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후보자만의 잘못은 아니다. 정당들이 판세가 불리할 때마다 수시로 개명을 하거나 이합집산을 하는 바람에 한국 정치인들에게서 ‘본적’ ‘원적’ 따지는 일이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지난 주말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제3지대 신당 창당’을 전격 발표하자 각 정당과 예비후보들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은근히 야권 표 분열에 따른 반사이익을 기대해온 새누리당이 ‘야합’이라며 맹비난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다급하다는 증거다.

야권이라고 느긋하게 선거를 치를 처지가 아니다. 3월 17일 창당 발기인대회에서 추인 받을 예정이었던 ‘새정치연합’은 출생신고도 못해 보고 사라질 판이다. ‘새 정치’를 바라던 이들이 ‘구정치’와의 통합에 실망해 등을 돌릴 가능성도 있다. 민주통합당에서 민주당으로 개명한 지 1년 만에 다시 문패를 바꿔 달아야 하는 민주당도 심란하긴 마찬가지다.

당장 6·4지방선거에서 민주당 기초 단체장 및 의원 후보들은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에 의해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서야 한다. 원래 공직선거법에 따라 국회 의석수를 기준으로 기호 1 새누리당, 2 민주당, 3 통합진보당, 4 정의당, 5번부터는 의석이 없는 정당에 부여하고, 그 후 무소속은 추첨에 따라 배정한다. 정치 개혁의 명분도 좋지만 소속 정당을 밝히지 못하고 선거를 치러야 하는 후보들은 마치 총 없이 전쟁터로 내몰린 기분일 것이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하는 것은 유권자들이다. 6·4지방선거의 투표용지는 모두 7장(광역단체장, 광역의회 의원, 광역의회 비례대표, 기초단체장, 기초의회 의원, 기초의회 비례대표, 교육감)이다. 광역 투표용지에는 정당 기호가 인쇄되지만, 기초 단체장 및 의원 투표용지에는 2번이 빠지고, 기초 비례대표에는 다시 2번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신당 합의에 따라). 교육감 투표용지에는 기호 없이 후보자 이름만 인쇄되는데 그마저 선거구별로 순환배열하기로 했다. 자칫 ‘후보자 이름도 몰라요 정당도 몰라요’ 식의 ‘깜깜이 투표’가 되기 십상이다. 또 기존의 습관대로 ‘무조건 기호 1번’ ‘찍을 때는 위에서 두 번째’ 식으로 선거운동을 했다가는 엉뚱한 후보가 당선되는 ‘로또 투표’가 될 수도 있다.

믿을 것은 후보 개인의 능력에 집중해 신중하게 가려내는 유권자의 안목밖에 없다. ‘가리다’는 의미의 한자로 선(選)과 택(擇)이 있다. 흔히 ‘선택(選擇)’을 한 단어로 쓰지만, 각각의 한자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선(選)은 ‘많은 것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내다’는 뜻으로 선수, 선발이란 단어에서 쓰인다. 반면 택(擇)은 ‘선악을 분별해서 가려내다’는 뜻이 강하다. ‘중용(中庸)’의 ‘성실한 자는 선을 택해 굳게 잡은 자(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라는 말에서 ‘택선(擇善)’을 확인할 수 있다. 선거(選擧)는 선악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그중 나은 것’을 찾는 선(選)이다. 복잡해진 선거판에서 “그놈이 그놈, 누가 돼도 달라질 게 없다”고 푸념만 하다가 ‘그중 나은 사람’을 가려낼 권리와 책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khmzip@donga.com
#선거#후보#제3지대 신당 창당#김한길#안철수#6·4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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