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23>슬픈 로오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슬픈 로오라
―이문재(1959∼)

길을 바다의 끝까지 데려다 주고 교실로 들어선다
오전에 읽던 죽은 사람들의 책은 아직 열려 있고
칸나는 한 발짝도 여름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봉화촌의 아이들
산에서 멀거니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아이들
오늘은 굿당이 조용하고
수평선은 일전의 자리로 돌아가 있다 소나무 숲이
아주 많은 날들을 매어 달고 외로움에 지친
여자들의 헝겊을 아직 매달아 주고

달을 바라보는 칸나
분교의 지붕에는 소금기가 많이 남아 있다
방금 바다에서 올라간 구름들이 서성거리고
가까운 집에서 기침소리가 난다
깨진 유리창으로 들어서는 바다는 발이 퉁퉁 불어 있고
선착장까지 데려다 준 길들이 고개를 들어 힐끗
교실을 바라보고 있다
칸나의 뿌리 속으로도 해풍에 녹스는
어둠이 자리잡고

이곳을 떠나면 죽음의 나라
나는 낡은 풍금의 페달을 밟으며 로오라를 이름
부른다 낮은 구름들이 웅성거리며
섬의 주위로 내려온다
풍향계를 바라보면 바람은 나에게 들키고 페달을 밟고 있는
나의 리듬이 자꾸 어둡고 깊어질 때

바다는 잠시 그의 품안에 들어서는
물고기나 여름의 난류를 허락하고 있는 것 같다
로오라 나는 언제 온몸의 외로운 이끼를 씻고
그대의 낯익은 고장으로 달려갈 것인가
봉화대는 늘 어둡고
어두워져 있고

남자 어른은 드물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대부분인 외딴섬. 주민들의 삶이 순탄치 않았던 듯하다. 아마 바다도 황량하리라. 그 섬에 있는 분교에서 혼자 보내는 한여름. 방학을 맞아 텅 빈 운동장에 칸나 꽃이 한껏 붉고. 화자는 책을 읽다가 지치면 바닷가를 산책하고, 돌아와 다시 책을 읽고, 때로 아련한 슬픔과 그리움이 차올라 낡은 풍금의 페달을 밟는다. 그가 타는 곡은 패트릭 주베의 ‘슬픈 로라’이리라. 화자 가슴 깊이 불씨처럼 묻혀 있다 문득 치밀어 오르곤 하는 그리운 이, ‘로오라’가 좋아하는 음악일 테다. 화려한 피서지 대신 구태여 고적한 섬에 찾아든 청년의 외롭고 어두운 낭만! 나이를 먹으니 이 젊은 감정이 참으로 귀엽고 싱그럽구나. ‘슬픈 로라’의 멜로디와 더불어 그립기도 하고. ‘슬픈 로라’를 주제로 만든 영화 ‘로라, 여름날의 그림자’도 생각난다. 젊은 날은 그림자도 아름다워라!

황인숙 시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