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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단독]공기업의 甲질에…“탈락업체 제안도 우리가 이용”

입력 2013-06-20 03:00업데이트 2013-06-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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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보대행사 선정 상식밖 입찰공고
대한주택보증 입찰공고문 캡처대한주택보증 입찰공고문 캡처
온라인 광고대행사 직원 박모 씨는 19일 정부기관과 공기업의 사업을 입찰하는 ‘나라장터’를 둘러보다가 눈길 가는 공고문을 발견했다. 대한주택보증이 7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일할 온라인 홍보대행사를 최저가 입찰로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예산 규모는 1억 원이며 17일부터 입찰 제안서를 접수하고 있다고 했다.

박 씨는 유심히 공고문을 읽다가 분노했다. 대한주택보증이 올린 공고문에는 “제안서 평가 결과 사업자로 선정되지 않은 제안서의 내용도 우수한 내용으로 판단되어 사업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사업내용에 포함될 수 있음”이란 조항이 있었다. 입찰에 탈락한 업체들의 우수한 아이디어를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가져다 쓰겠다는 의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는 공기업이 ‘갑’의 지위를 이용해 ‘을’인 입찰업체의 지식재산권을 무단으로 침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입찰업체들은 대부분의 정부기관과 공기업 사업이 최저가 입찰 방식으로 이뤄져 가격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아이디어까지 빼앗길 수 있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 광고업체 대표는 “입찰업체들이 수백만 원의 비용과 인력을 들여 제안서를 준비하지만 낙찰받기는 하늘의 별따기”라며 “더구나 ‘갑’이 아이디어만 빼 쓰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발상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대한주택보증의 입찰 공고문이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퍼지자 비판이 잇따랐다. 업체 관계자들은 “그동안 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젠 아예 대놓고 염치없는 짓을 한다” “아이디어를 갈취하는 갑의 횡포는 범죄다” “프레젠테이션 비용이나 주고 저러면 덜 밉지. 비용은 다 우리에게 전가하면서 참 뻔뻔하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갑이 을의 노동력과 두뇌까지 빼먹는 꼴이지만 업체 입장에선 제안서를 안 쓸 수도 없다”는 탄식도 눈에 띄었다.

대한주택보증 측은 공고문이 논란이 되자 19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그런 의도로 조항을 적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논란이 된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며 “이미 나간 공고문을 수정할 수는 없고 입찰 제안 설명회에서 입찰에서 탈락한 제안서 내용은 쓰지 않겠다고 설명하겠다”고 해명했다.

정부기관이나 공기업이 입찰 과정에서 갑의 지위를 남용하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19일 본보가 ‘나라장터’를 살펴보니 발주처인 정부기관이나 공기업에 지나치게 유리해 보이는 계약조건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광주테크노파크는 3D융합상용화지원센터 홈페이지 구축 사업을 발주하면서 ‘갑(발주처)의 정책 변경 등 불가피한 경우 본 사업의 일부 또는 전부의 과업 지시를 변경할 수 있다’ ‘본 과업 지시서에 누락된 사항이라도 사업목적 달성을 위해 의도한 바와 같은 완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사실상 모든 변경이나 누락 사항에 대해 업체에만 책임을 지우는 식이다.

인천시의 시정홍보 책자 제작 과업 지시서에는 “발주처가 본 사업이 변경되어 발행 계획을 취소하고자 할 때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계약업체는 계약 해지에 따른 일체의 이의 제기나 기타 청구를 할 수 없다”는 문구도 있다.

정부기관과 공기업이 공공연히 ‘갑질’을 해도 업체들은 혹시나 다음 입찰에 불이익을 받을까 봐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한다. 지식재산권 전문가인 이영욱 변호사(사법연수원 34기)는 “업체 측이 입찰물을 만들어 제출하면 공기업이 낙찰은 안 하면서 자료만 빼가 버리는 사례를 종종 접수하고 있다”며 “이는 민법 104조에서 금지하는 불공정한 법률 행위에 해당하거나 공정거래법에 위반될 소지가 다분하지만 업체 입장에선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신고할 엄두를 못 내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조동주·김성규 기자 dj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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