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잘난 여자’ 많아진 세상… 부담없어 좋다 ‘못난 남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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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계 점령한 찌질男 캐릭터… ‘결함男’ 사랑받는 건 세계적 트렌드
韓, 싸이-무한도전 멤버들에 열광 美, 영화-드라마 등 찌질남 장악 日, 남성성 잃어버린 초식남 인기

① 최근 대중문화는 찌질한 남자들이 점령하고 있다. 8년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리얼 버라이어티쇼 ‘무한도전’. 동아일보DB ②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끈 가수 싸이. 동아일보DB ③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의 무능한 가장 호머 심슨. 동아일보DB ④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 찌질한 남자 캐릭터를 연기한 한국계 미국배우 켄 정. 동아일보DB ⑤ 군대 예능 ‘진짜 사나이’에서 사랑받고 있는 샘 해밍턴. MBC TV 화면 캡처 ⑥ 미국 시트콤 ‘오피스’의 한심한 상사 마이클 스콧(스티브 카렐). 폭스라이프 제공 ⑦ 얼간이 과학도 4명이 등장하는 미국 시트콤 ‘빅뱅이론’. 빅뱅이론 페이스북
① 최근 대중문화는 찌질한 남자들이 점령하고 있다. 8년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리얼 버라이어티쇼 ‘무한도전’. 동아일보DB ②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끈 가수 싸이. 동아일보DB ③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의 무능한 가장 호머 심슨. 동아일보DB ④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 찌질한 남자 캐릭터를 연기한 한국계 미국배우 켄 정. 동아일보DB ⑤ 군대 예능 ‘진짜 사나이’에서 사랑받고 있는 샘 해밍턴. MBC TV 화면 캡처 ⑥ 미국 시트콤 ‘오피스’의 한심한 상사 마이클 스콧(스티브 카렐). 폭스라이프 제공 ⑦ 얼간이 과학도 4명이 등장하는 미국 시트콤 ‘빅뱅이론’. 빅뱅이론 페이스북
아시아 졸부 같은 차림의 올백머리 남자가 육중한 몸을 격렬하게 흔든다. 꽉 조이는 셔츠 탓에 출렁거리는 배가 유난히 돋보인다. 화면 밖까지 그의 땀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자신감은 충만하다. 걸을 땐 턱을 살짝 치켜세우고, 춤을 출 땐 골반을 세차게 돌린다. 다리를 쫙 벌리고 앉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현실이라면,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하지만 현재 이 캐릭터, 싸이는 세계인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다.

뮤직비디오 속 싸이뿐 아니라 요즘 TV에서 인기 있는 캐릭터는 대부분 ‘진상’과 ‘찌질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남자라는 사실. 8년째 사랑받는 ‘국민 예능’ 무한도전의 멤버-‘날라리’(유재석) ‘하찮은’(박명수) ‘식신’(정준하) ‘사기꾼’(노홍철) ‘상꼬마’(하하) ‘뚱보’(정형돈) ‘대머리’(길)-중 ‘나잇값’ 하는 어른은 없다.

남자들끼리 싸구려 먹을거리를 두고 싸우고, 무식함을 경쟁하는 것은 요즘 예능의 트렌드다. 군대에서 ‘뽀글이’ 라면을 흡입하는 30대 후반의 샘 해밍턴(‘진짜 사나이’)과 ‘짜파구리’에 열광하는 일곱 살배기 윤후(‘아빠! 어디가’)는 유치함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드라마에서도 모자란 남자는 감초처럼 등장한다. 최근 종영한 ‘직장의 신’에서 남자 주인공 장규직 과장(오지호)은 완벽한 미스 김(김혜수)에 비해 얼마나 한심한가. ‘백마 탄 왕자’ 캐릭터들도 예전에 비하면 ‘빈틈’이 많은 편이다. 대부분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장애를 앓거나 어딘지 모자라서 생활력 강한 여주인공의 실질적인 뒷바라지가 요구되는 게 사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현상이 한국의 특수 상황이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학자인 리모 쉬프만 히브리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가 수천만 명이 공유한 유튜브 영상을 분석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flawed masculinity’, 즉 ‘결함 있는 남성성’은 ‘평범한 인물’ ‘유머’ ‘단순성’ ‘반복성’ ‘기발하고 엉뚱한 콘텐츠’와 함께 인기 동영상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꼽혔다.

유튜브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주류인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드라마, 코미디에서도 어딘지 부족하거나 문제가 많은 남자들이 숱하게 나온다. 한국계 미국인 코미디언 켄 정이 출연하는 ‘행오버’는 철없는 남자들의 총각파티를 다룬 코미디 영화다. 저속한 유머에 찌질한 장면이 적지 않지만 2009년 1편, 2011년 2편이 나온 후 흥행에 성공해 최근 미국에서 3편이 개봉했다. 지난해 개봉한 ‘19곰 테드’도 철없는 남자와 그의 방탕한 곰인형 테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역시 흥행에 성공해 현재 2편이 준비 중이다.

시트콤과 애니메이션에서는 ‘못난 남자’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시트콤 ‘빅뱅이론’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은 유치하고 찌질한 행동을 일삼는다. 시트콤 ‘오피스’의 남자 주인공인 마이클 스콧은 눈치 없이 민폐를 끼치는 괴짜 보스다.

현재 24번째 시즌이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의 아버지 호머 심슨 역시 가장으로서의 권위는커녕 자녀들에게 무시당한다. 심슨가족이 20세기 말 미국 가족의 상징이라면 21세기 가족을 그린 애니메이션으로는 ‘패밀리가이’가 있다. 패밀리가이의 아버지 피터 그리핀 역시 호머 심슨 못지않게 어수룩한 인물이다. 일본 드라마에서는 남성성을 잃어버린 듯한 ‘초식남’ 캐릭터가 인기를 끈다. 올해 초 방송된 일본 인기 드라마 ‘최고의 이혼’에도 쪼잔하고 공감 능력 떨어지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했다.

왜 최근의 대중문화는 이처럼 ‘찌질함’에 주목할까. 또 그 대상이 남자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새 남자들이 진짜 찌질해진 걸까. 호주의 고고학자이자 고인류학자인 피터 매캘리스터는 저서 ‘남성퇴화보고서’(2012년)에서 오늘날 남성과 450년 전 고대 남성을 비교하며 남성이 힘과 외모는 물론 성적 능력에서 진화는커녕 오히려 퇴보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해나 로진은 ‘남자의 종말’(2012년)에서 후기산업사회가 남성보다 여성이 더 유리한 사회라고 썼다. 남성성 자체의 퇴화를 주장한 매캘리스터와 달리 로진은 힘으로 상징되는 남성성이 현대사회에서는 점점 쓸모없어지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의 철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미디어학자, 광고 전문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문화평론가 10명에게 ‘대중문화에서 결함 있는 남성성이 인기 있는 이유’를 물었다. 이들은 현대사회에서 달라진 남녀의 위상, 산업구조의 변화를 그 이유로 꼽았다. 계급과 인종차별의 문제, 가부장제 내에서 남성 억압에 주목한 해석도 나왔다.

▼ 왜 대세? 학자-전문가들에 물어보니 ▼

■ “女상위 시대, 과한 남성성은 흠” “男, 가부장제 압박에서 벗어나” “빡빡한 세상, 망가지는 男 호감”

시대가 원하는 남성상은 ‘모자란 녀석’

“여자라고 특별히 못할 것도 없는 시대에 남자에게 딱히 바라는 것도 없다. 남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잘 울고 잘 웃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유머까지 있으니까 사랑받는 거다. 가끔씩 기대하지 않은 감동을 주면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이주향 수원대 철학과 교수)

“좀 허술해 보이는 이성에게 호감을 갖는 심리가 있다. 결함 있는 남성성이 인기를 끄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스타론’의 창시자인 에드가르 모랭에 따르면 스타는 ‘범접할 수 없는 완전체’라는 게 그동안의 정설이었는데, 전통적인 스타 개념이 변화하는 것 같다.”(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섬세함이나 배려 같은 여성적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남성성의 불황기다. 과한 남성성은 그 자체가 결함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남성성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과 교수·영화평론가)

“여성 시청자가 늘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 중에서도 여자가 늘다 보니 여성의 시각에서 남자를 보는 시도가 늘었다. 남자가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게 아니라 원래 있던 남자의 본질이 최근 유난히 부각되는 것 같다.”(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남자, 가부장제의 압박에서 벗어나다

“가부장제에서는 남자도 억압받는다. 그나마 여성은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언어를 갖게 됐지만 남자는 그렇지 못하다. 한국에서 남성성이 진지하게 논의된 적 있나. 이런 상황에서 요즘 TV 속 남자들에게서는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느껴진다.”(김예란 광운대 미디어학과 교수)

“가부장의 권위가 무너진 시대에 완벽한 남자란 비현실적이다. 한국에서는 결함 있는 남성 캐릭터가 1990년대 후반부터 숱하게 등장해 왔다. 지난해 나온 영화 ‘건축학개론’이 남성의 찌질함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본다. 건축학개론은 주인공 남자가 첫사랑을 돌아보며 과거 자신의 비겁함과 찌질함을 반성하는 영화다. 현재 찌질할 뿐 아니라 과거에도 찌질했다는 것에 대한 인정 아니겠는가.”(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결함 있는 남성성은 백인 주류 남성의 위기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과거 미국 대중문화의 주류가 카우보이였다면 이젠 너드(nerd·얼간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나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도 고전적인 남성상과 비교하면 찌질한 이들 아닌가. 남성성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김치완 대중문화평론가)

심신이 피곤한 세상, 망가져도 좋아!

“망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망가지는 남자를 보면 내가 감추고 싶었던 모습을 대신 드러내주는 것 같은 통쾌함을 느끼고 호감도 커지지 않나.”(권현정 제일기획 캠페인 17팀장)

“전통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사회적으로 더 많은 권위를 부여받는다. 그러다 보니, 남자가 망가져 권위가 무너질 때 느껴지는 충격 혹은 쾌감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전문직 역할을 주로 했던 미남 스타가 나이 들어 찌질한 백수 아저씨를 연기하면 파격적으로 느껴지는데, 여성의 경우 망가져 봤자 수다스러운 아주머니다. 그 계급 차가 크지 않다.” (서우석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

못 가진 자의 ‘반발 심리’ 발현

“결함 있는 남성성이라는 말 자체가 난센스다. 그렇다면 어떤 남성성이 온전한 남성성인가. 오히려 최근의 현상들은 계급 간의 차이와 갈등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뮤직비디오 속에서 뚱뚱하고 찌질해 보이는 싸이는 중산층 이상의 잘나가는 백인 남자들과 대비되며, 그들에 대한 빈정거림이나 조롱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예능에서 보여주는 유치함이나, ‘일베’ 같은 사이트의 극단적 성향은 유순한 중산층 배운 남자에 대한 저항이나 혐오로 이해될 수 있다.” (서동진 계원예대 디지털콘텐츠군 교수)

“백인 남성 중심의 서구 문화에서 싸이나 한국 아이돌 같은 동양인 남자의 부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결함 있는 남성성의 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트렌드를 지지하는 이들은 어쩌면 그동안 주류문화에서 소외됐거나 반감을 가진 계층일 것이다.”(임근준 미술평론가)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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