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문정희]참지 말라, 침묵하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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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객원논설위원·시인
문정희 객원논설위원·시인
큰 꿈을 안고 일본으로 유학 간 한 여성이 아는 남성과 데이트하던 중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는 상처와 분노와 비탄에 빠져 살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1896∼1951)의 이야기다.

춘원 이광수가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발표한 1917년에 그녀는 잡지 ‘청춘’에 소설이 당선돼 문단에 나온 소설가이고 ‘창조’ 동인으로 활약한 시인이다. 하지만 한국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해도 김명순을 작가라기보다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델로 성적(性的)으로 헤프고 문란한 여자 정도로 기억한다.

김명순은 120여 편의 시와 20여 편의 소설, 희곡, 번역, 수필을 쓰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한 지식인 여성이었다. 수많은 명작을 섭렵한 후 에드거 앨런 포를 최초로 번역 소개한 것도 그였다. 명실공히 나혜석 김일엽과 함께 근대 한국문학사의 선두에 섰던 여성이다.

국정여학교 4학년 시절 19세인 그녀에게 성폭행을 가한 사람은 당시 일본군 육군 소위 L이었다. 김명순은 이 일로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된다. “한 사람에게 받은 능욕과 멸시로 찬 모든 수치의 저수지가 된 어느 날 하루 잊힐 날이 있었으랴”(네 자신의 위에·1925)라며 가슴을 치고 탄식한다.

그 후 고향 선배인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으로 그녀는 다시 사회적 폭력을 당한다. “모든 세상에서 돌리우고 거기서도 또 학대를 주지 못해서 흐물거리는 그 정경에서야…”라며 울부짖는다. 당시 매일신보는 이 사건을 3회에 걸쳐 게재했다.

김명순을 파멸시킨 가해자 L은 그 후 민족 운동가들과 협력, 초대 육군 참모장을 지냈고 훈장과 함께 현재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전형적인 남성 중심의 정절(貞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비극적인 희생자가 김명순인 것이다.(김경애 논문 인용)

성폭력은 신체적 물리적 언어적 정신적 폭력을 포괄한다. 더구나 이 경우는 교제하는 남성과의 사이에 일어난 데이트 강간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남성 성폭력에 대한 인식은 하나의 학습된 구성물로서 여성을 지배하여 성취감을 통해서 남성다움을 실현하는 것이다. 남성은 본능적으로 강한 폭발적 성욕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주도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행동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성폭력 가해자에게는 그럴 수 있다고 면죄부를 주는 동시에 피해자인 여성에게는 원인 제공자요, 헤픈 여자라는 오명을 덮씌운다.(권수현 논문 인용)

최근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 모욕 사건을 보고 모두가 분개하며 가해자의 응징에만 집중하느라 피해자의 깊은 상처와 분노에는 다소 소홀한 것을 가슴 조이며 지켜보았다. “막중한 공무 중에…”라든가 “개인의 도덕 문제로 대통령 방미 성과와 국격을 떨어뜨린 사건”이라는 부분으로 초점이 더 가기도 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냥 지나쳐서는 결코 안 될 부분이 성희롱 피해자가 이제는 더이상 참거나 침묵하지 않는 시대가 확실히 왔다는 사실이다. 정당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알렸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변에서는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런 ‘재수 없는 일(?)’은 사방에서 더욱 빈번히 일어날 것이다.

피해자가 부당함을 참고 침묵하는 시대가 끝났음을 확실히 알리는 조종(弔鐘) 소리를 이 사회가 확인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이번 사건에서 놓치지 말고 건질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적 남성 중심적 성 이데올로기의 종식을 분명하게 고하고 재교육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 어떤 공부보다 먼저 제대로 가르치고 길들여져야 할 중요한 목록이 되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성폭력은 중범죄이며, 직장 내의 성희롱에 대한 조목도 구체적으로 만들어 강력하게 교육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고발도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한국 여성은 상당 수준 개발된 지 오래이다. 이 개발된 여성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남성이 아직도 잘못된 가부장적 관습 속에 방치되어 있다면 이 같은 범죄는 앞으로 얼마든지 반복돼 일어날 것이다. 사실 눈만 뜨고 나면 성폭력과 성희롱 사건이 뉴스를 뒤덮고 있지 않는가. 윤창중 전 대변인 또한 그런 의미에서 오랜 관습과 남성 중심 성 이데올로기의 역설적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이 이 땅의 딸로 태어난 지 100년이 넘었다. 남성 중심 사회가 살해한 여자, 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모교 동창회 명부에서조차 지워져버린 그에게 정당한 명예 회복과 문학적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상처와 분노로 숨죽이며 울고 있는 수많은 피해자들과 잘못된 전통과 관습으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이 더이상 생겨나선 안 된다.

문정희 객원논설위원·시인 poetm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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