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문 “캐디백 멨던 엄마, 당신은 영원한 나의 빽”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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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문, PGA 바이런 넬슨 챔피언십 우승

20kg이 넘는 캐디백을 짊어지고 18홀을 돌고 나면 발목이 퉁퉁 부었다. 밤새 찬물에 발목을 담가 통증을 가라앉힌 뒤 이튿날이 되면 다시 캐디백을 멨다.

성적이 좋은 날은 그나마 괜찮았다. 그렇지 않은 날엔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아침을 굶고 캐디를 한 날도 적지 않았다. 4라운드 대회를 마친 뒤엔 심한 몸살을 달고 살았다. 몸무게 54kg의 50대 여성에게 프로용 캐디백은 무거움을 넘어 가혹하기까지 했다.

20일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바이런 넬슨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배상문(27·캘러웨이)의 어머니 시옥희 씨(57)는 불과 몇 해 전까지 아들의 전속 캐디였다. 시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나 싶다. 당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도 자식이라서 그렇게 했다. 나뿐 아니라 세상 엄마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다”라고 했다.

배상문이 2007년 한국프로골프(PGA) SK텔레콤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어머니 시옥희 씨와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해 온 시 씨는 이 대회에 아들의 캐디로 참여했다. 동아일보DB
배상문이 2007년 한국프로골프(PGA) SK텔레콤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어머니 시옥희 씨와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해 온 시 씨는 이 대회에 아들의 캐디로 참여했다. 동아일보DB
캐디백은 대개 아빠들이 멘다. 골프선수인 자식을 위해 코치와 매니저, 운전사, 캐디 등 1인 다역을 하는 ‘골프 대디’는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시 씨는 보기 드문 ‘골프 마미’였다. 개인 사정상 시 씨는 생후 5개월 때부터 아들을 혼자 키워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들은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아들의 우상은 ‘국민타자’ 이승엽(삼성)이었다. 시 씨는 야구부에 넣어 달라는 아들에게 대신 골프채를 쥐여줬다.

제대로 된 레슨 한 번 시키지 못했지만 아들의 재능은 특별했다. 본격적인 선수로 나서 재능을 발휘할수록 가정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연습라운드, 공값, 옷값, 이동 경비 등등 돈 들어갈 곳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집을 팔았고, 차를 팔았고, 결국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까지 팔았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 10만 원가량 했던 캐디피라도 아껴 볼 생각으로 직접 백을 메기 시작했던 것이다.

배상문이 한국 무대에서 뛸 당시 시 씨는 ‘극성 엄마’로 유명했다. 경기를 잘 못하면 현장에서 심하게 야단을 치곤했다. 이 때문에 대회장 출전정지 처분을 당한 적도 있다. 시 씨는 “아들을 혼자서 키우다 보니 그때는 너무나 절박했다. 사춘기에는 많이 다투기도 했는데 그래도 잘 따라준 아들이 너무 고맙다”고 했다. 2008년과 2009년 연속 한국 투어 상금왕을 차지한 배상문이 이듬해 일본투어로 떠나면서 시 씨도 캐디백과 작별을 했다.

하지만 “엄마는 나의 영원한 캐디”라는 배상문의 말처럼 모자는 몸은 떨어져 있었어도 마음만은 함께했다. 배상문은 2011년 일본투어에서 3승을 거두며 한국에 이어 일본에서도 상금왕에 올랐다. 그리고 PGA투어 퀄리파잉스쿨 삼수 끝에 지난해 미국 무대에 진출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PGA투어는 격이 달랐다. 우승은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지난해 후반엔 향수병까지 도지면서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배상문은 “호텔 방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라는 자괴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16일 미국 텍사스 주 어빙의 포시즌스TPC(파70·7166야드)에서 시작된 PGA투어 바이런 넬슨 챔피언십. 독실한 불교신자인 시 씨는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이날부터 경남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들이 돌잡이일 때부터 데리고 다니던 절이었다.

최종 라운드를 하루 앞둔 19일 밤. 3라운드까지 선두 키건 브래들리(미국)에게 한 타 뒤지고 있던 배상문과 시 씨는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이런 대회를 나눴다. “엄마, 나 우승할 수 있을까.” 시 씨는 답했다. “응, 넌 꼭 우승한다.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쳐라.” “엄마, 몸 상하니까 무리해서 기도 안 해도 돼.”

배상문은 이번엔 절호의 우승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메이저대회 PGA 챔피언십을 포함해 3승을 올린 브래들리와의 챔피언조 맞대결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1타를 줄인 배상문은 최종 합계 13언더파 267타로 마침내 PGA 첫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상금은 117만 달러(13억 원). 한국 국적 선수로는 최경주(43·SK텔레콤), 양용은(41·KB금융그룹)에 이어 세 번째 우승. 한국계 교포 선수인 앤서니 김(27·나이키골프), 케빈 나(30·타이틀리스트), 존 허(23)까지 포함하면 여섯 번째다.

배상문이 우승을 확정짓던 순간에도 시 씨는 밤새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지인들의 축하전화를 받고서야 아들이 우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 씨는 감사 인사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인제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 아들을 믿습니다. 앞으로 세계 최고가 될 겁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배상문#PGA 바이런 넬슨 챔피언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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