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강혜승 기자의 엄마 도전기]<4>1115번… 배 속 아기 어린이집 대기번호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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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슬픈 가족사가 얼마나 많을 줄 아니?”

아이 맡길 곳 찾기가 만만치 않다는 푸념에 친구가 털어놓은 사연은 절절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는 올 초 아이를 낳고 출산 휴가 3개월 뒤 복직했다. 젖먹이를 맡길 어린이집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못 찾았다. 서울에 계신 시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시댁은 노원구, 직장은 강남구, 남편 직장은 경기 안양시에 있다. 결국 이산가족이 됐다. 친구와 아이만 시댁에 들어가고, 남편은 회사 근처에 따로 집을 구했다.

오전 8시 출근인 친구는 매일 6시 반에 집을 나선다. 야근이 잦아 오후 10시에 퇴근해 시댁에 도착하면 자정이 가깝다. 편도 2만 원이 넘는 택시비를 뿌려 가며 강남에서 노원까지 한달음에 달려도 아이의 잠든 모습만 보기 일쑤다.

친구의 ‘슬픈 가족사’에 놀라 당장 동네 어린이집을 뒤져 봤다. 젖먹이 전담인 0세반을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있긴 한데,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였다. 그것도 전문 시설이라기보다 아파트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얼마 전 가정 어린이집에서 사고가 났는데….’ 그래도 “아이를 맡길 수 있는지” 물었더니 “0세반 정원이 3명인데, 지금 대기자만 70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쉬운 건 그쪽이 아니었다.

유명한 어린이집 대기자가 1000명이 넘는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집 근처 어린이집들까지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 줄은 몰랐다.

서울시내 어린이집 정보를 모두 모은 서울시 보육포털서비스를 통해 알아보니 시내 어린이집 6487곳 중 0세반을 운영하는 곳은 54곳에 불과했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국공립은 몇 안 되고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어린이집이 젖먹이들을 기피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만 2세만 돼도 교사 대 아이 비율을 1 대 7로 둘 수 있지만, 0세는 1 대 3으로 교사 수를 늘려야 한다. 운영비도 많이 들고, 예기치 않은 사고도 많다.

임신 6개월째인 또 다른 친구는 최근 날벼락을 맞았다. 27개월 된 딸이 다니고 있는 구청 어린이집에서 내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전에 나가 달라는 통보를 했다. 내년부터는 500인 이상 사업장에 어린이집 설치가 의무화돼 구청 어린이집이 국공립에서 직장 어린이집으로 바뀌면서 일반인 자녀는 입소가 안 된다는 것이다. 0세반이 있던 몇 안 되는 곳인 데다 직장 근처여서 만족하던 친구는 “첫애는 그렇다 쳐도 곧 태어날 둘째는 어떡하느냐”며 망연자실한 상태다. 친구는 집과 직장 주변에서 민간 어린이집 한 곳을 찾았지만 “생후 6개월 전 아이는 안 받는다”는 답만 들었다.

어린이집이 이처럼 큰소리치며 아이들을 골라 받을 수 있는 건 정부 덕(?)이 크다. 만 0∼2세 무상보육 정책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 무조건 정부로부터 30여만 원을 받을 수 있으니 맞벌이 아닌 전업주부들까지 너도나도 아이를 맡긴다.

세 살배기 딸아이를 둔 한 선배는 아예 어린이집을 포기하고 ‘놀이학교’에 보낸다. 어린이집이 학교라면, 놀이학교는 일종의 학원 같은 곳인데 무려 월 100만 원이 든다. 영어 원어민 교사도 있고, 교사 대 아이 비율이 1 대 3이어서 여건이 좋지만, 좋아서 보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올해부터 만 0∼2세 무상보육이 전면 실시되면서 어린이집을 구하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택한 차선책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선배는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둘째의 월 100만 원이 넘는 교육비에 허덕이면서도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고 한다.
강혜승 기자
강혜승 기자

‘1115번.’

세상 물정 모르고 있다가 부랴부랴 집 근처 어린이집에 등록한 배 속 아기의 대기번호다. 아이를 낳기도 전에 맡길 곳이 없어 어린이집을 찾아 발을 굴러야 하는 부모, 제 이름을 갖기도 전에 대기번호로 불리는 아기. 이게 바로 저출산 극복을 외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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