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누명 39년… 옥살이 15년… 77세에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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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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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 성폭행 - 살인 혐의 정원섭 씨 끝내 진실 밝혀…재심 통해 대법 무죄 확정

“내가 잘못 들은 것 아니지? 방금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고 말한 것 맞지?”

27일 오후 2시 반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대법원 1호 법정 밖으로 나온 정원섭 씨(77·목사·사진)는 변호사와 지인들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1972년 10월 파출소장의 딸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돼 15년간 옥살이까지 했다가 39년 만에 누명을 벗은 그의 입술은 감격과 회한으로 떨리고 있었다.

기구한 정 씨의 사연은 1972년 9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원 춘천시 우두동 논둑에서 춘천의 한 파출소 소장의 딸(당시 11세)이 성폭행을 당한 뒤 목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발표하기 직전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은 이 사건을 ‘전국 4대 강력사건’의 하나로 규정해 열흘 안에 범인을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찰은 피해자의 집 근처에서 만화방을 운영하던 전도사 정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정 씨는 사흘 동안 물고문 등을 받은 뒤 허위 자백을 했고 경찰은 “범행을 순순히 자백했다”며 검거 시한을 하루 앞두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법정에 선 정 씨는 “고문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3년 11월 그는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다.

15년간 옥살이를 한 정 씨는 1987년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그동안 수차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으려 했고 아내는 생계를 위해 일하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겨우 세상 밖으로 나온 정 씨는 신학공부에 매진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누명을 벗을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은 1995년이 되어서였다.
▼ “사필귀정… 고문했던 이들 용서하고 명예 찾았지만 내 삶은…” ▼

초등학생을 성폭행하고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돼 15년간 옥살이를 한 뒤 27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정원섭 씨.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초등학생을 성폭행하고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돼 15년간 옥살이를 한 뒤 27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정원섭 씨.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당시 사건에서 정 씨의 국선변호를 맡았던 고 이범렬 변호사는 식도암으로 죽음을 앞둔 채 정 씨를 만났다. 이 변호사는 정 씨에게 “꼭 재심을 신청해 보라”며 보관하고 있던 수사기록과 재판자료를 건넸다. 이 변호사는 법률전문지 ‘시민과 변호사’에 기고한 글에서 “아직도 그 사건만 생각하면 창자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며 통탄하기도 했다.

정 씨는 1997년 박찬운 임영화 정영대 변호사로 구성된 변호인단과 함께 당시의 사건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30년 전의 진실을 캐나갔다. 무죄를 확신한 변호인단은 1999년 11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동아일보 법조팀도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힘을 쏟았다. 1000쪽이 넘는 사건기록을 바탕으로 강원 춘천시 홍천군, 충남 천안시, 경남 진주시 등 전국 각지에서 당시 피해자의 부검의와 수사 경찰을 포함한 증인들의 인터뷰를 3개월간 이어갔다. 동네 사람들에게선 “협박에 못 이겨 거짓진술을 했다” “경찰서에서 덜덜 떨다가 화장실에 신발을 떨어뜨렸다” 등 기록에 적힌 것과 다른 진술이 쏟아졌다. 이 취재 내용은 2001년 3∼10월 13차례에 걸쳐 보도됐다.

1972년 현장 검증 27일 무죄 판결을 받은 정원섭 씨가 1972년 현장 검증할 때 의사진. 정 씨는 당시 사흘 동안 물고문 등을 받은 뒤 허위 자백을 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DB
1972년 현장 검증 27일 무죄 판결을 받은 정원섭 씨가 1972년 현장 검증할 때 의사진. 정 씨는 당시 사흘 동안 물고문 등을 받은 뒤 허위 자백을 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DB
2001년 10월 서울고법은 “증인들의 번복된 진술을 믿기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정 씨는 오히려 “괜찮다. 힘내시라”며 변호인단과 동아일보 기자들을 위로했다. 정 씨는 포기하지 않고 2005년 다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요청했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춘천지법에 재심을 권고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2008년 11월 열린 춘천지법 재판에서 정 씨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재판부로서는 감히 이 사건의 진실에 도달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면서도 “수사 경찰의 감금 폭행 회유 등 위법한 수단이 동원된 것으로 보이는 만큼 공소사실에 대한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밝혔다. 정 씨는 허리를 깊이 숙여 재판부에 인사했다. 2009년 2월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그는 다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원섭 씨의 사연을 보도한 2001년 3월 22일자 동아일보 1면(왼쪽)과 관련자 증언을 후속 보도한 같은 해 3월 27일자 지면.
정원섭 씨의 사연을 보도한 2001년 3월 22일자 동아일보 1면(왼쪽)과 관련자 증언을 후속 보도한 같은 해 3월 27일자 지면.
대법원 1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27일 정 씨의 강간치사 및 살인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정 씨가 경찰 조사 단계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해 거짓 자백을 하고 이후 검사의 조사 단계에서도 비슷한 심리 상태에서 거짓 자백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정 씨는 무죄 확정 판결이 내려진 직후 기자들과 만나 “나를 고문한 사람들을 명예롭게 용서하기 위해 재심을 신청했다”며 “이제 누명을 벗었으니 그들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너무 늦기는 했지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며 “나의 결백함을 믿어주셨던 스승인 고 김재준 목사의 묘소에 판결문을 들고 찾아 뵙겠다”고 말했다.

그는 법정을 나온 뒤 “동아일보에 정말 고맙다”며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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