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고지전’ 이제훈 “할수록 어려운 연기…하나하나 채워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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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29일 10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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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은 충무로의 주목받는 신인 중 한 명으로, 봉준호 감독은 전작 ‘파수꾼’을 보고 그를  ‘신선한 발견’이라고 표현했다. 사진출처=스포츠동아DB.
이제훈은 충무로의 주목받는 신인 중 한 명으로, 봉준호 감독은 전작 ‘파수꾼’을 보고 그를 ‘신선한 발견’이라고 표현했다. 사진출처=스포츠동아DB.

하얗고 깨끗한 피부, 오뚝한 코, 호리호리한 체격…. 햇볕이 쨍쨍한 오후, 삼청동의 카페에서 만난 이제훈(27)은 전형적인 '훈남'이었다.

이제훈은 개봉 1주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고지전'(20일 개봉)에서 신일영 대위를 연기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2월 교착상태에 빠진 동부전선 최전방 애록고지의 악어부대. 어린 나이의 그는 전장에서 맨몸으로 수류탄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용맹함과 카리스마로 부대를 이끈다.

방긋방긋 밝은 웃는 이제훈의 얼굴에서 영화 속 날선 신일영 대위의 모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올 3월에 개봉한 영화 '파수꾼'의 강단 있는 고등학생 기태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히려 선한 인상이 풋풋함이 돋보였던 조연출 우형(영화 '김종욱 찾기(2010)')과 닮았다.

▷ '산 사나이' 고수 피해 나로호 우주센터로 피신

"아…술자리가 많았어요. 신하균 형은 정말 큰 선배이자, 도와드려야 하는 형이죠. 외로움이 많아요. (웃음) 제가 후배로서 할 게 많습니다. 주량이요? 소주 1병인데, 막내니까 자리를 끝까지 지켜야죠. (이)다윗이는 미성년자니까 술을 못 마시잖아요. 강한 정신력으로 버텼습니다. 어제도 새벽 5시에 들어갔어요."

이제훈은 요즘 선배의 '지독한' 외로움을 덜어 줄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연기를 마냥 꿈꾸던 시절, 스크린 너머로 동경하던 배우 신하균과 같이 영화를 찍은 소감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고지전'은 지난해 9월부터 6개월 동안 경남 함양 백암산 등에서 촬영했다. 전쟁이다 보니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거친 촬영장이었다. 그만큼 에피소드도 다양하다.

"촬영이 없던 날 류승수 형이랑, 고창석 형이랑 나로호 우주센터를 놀러 갔습니다. 성인 남자 셋이서 우울하게 말이죠. 사실 그날 고수 형이 등산을 가자고 했는데, 겁먹고 도망쳤어요."

전투 장면이 많아 타박상과 찰과상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제훈은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표현했다. "막내라 엄살도 부릴 수 없었지만, 많은 선배님과 오래 촬영하면서 많이 배우고, 또 좋은 말씀 많이 들었어요."

“가끔 알아봐 주시는 분도 있지만, 제가 아이돌도 아니고. ‘꺄악~’ 이런 일은 없어요. 하하.”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실감하느냐고 묻자 이제훈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사진제공=이노기획
“가끔 알아봐 주시는 분도 있지만, 제가 아이돌도 아니고. ‘꺄악~’ 이런 일은 없어요. 하하.”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실감하느냐고 묻자 이제훈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사진제공=이노기획

▷ 캐스팅까지 오디션만 3번, 3개월의 기다림

이제훈은 '고지전'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는 순간 압도됐다고 한다. 풍부한 이야기와 색다른 캐릭터 신일영 대위, 게다가 충무로의 블루칩 장훈 감독. 욕심이 났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캐스팅 과정도 길었지만, 되고도 쉽지 않았어요. 신일영을 어른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판단 하나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지만, 어디까지나 어린아이의 모습도 간직하고 있길 바랐어요. 두 가지 모습을 조율하는 게 쉽지가 않았어요. 하면서도 '이게 맞나?'라는 의구심도 들었죠. 그래서 감독님에게 많이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지전' 찍을 때는 촬영이 끝난다는 걸 상상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촬영 분량이 끝나고, 크랭크업을 하고 한두 달이 지나도 계속 여운이 남았다고.

"연륜이 쌓이면, 연기가 점점 쉬워질 줄 알았는데…. 하면 할수록 어렵네요. 배우가 쉽지 않은 직업이라는 걸 이번에 또 알았어요. 또, '평화'란 단어가 얼마나 소중한지, 정말 구체적으로 알게 됐고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희생시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전에는 그 개념이 얕았다면, 지금은 더 깊이 느끼게 됐죠."

이내 "아, 어렵네요. 잘 정리해주세요."라고 웃으며 당부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적확한 단어와 표현을 찾으려고 빠르지 않은 말투로 종종 뜸을 들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고르는 모습에서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인성과 박해일을 닮은 마스크’란 말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제훈은 “아, 민망하네요.”라고 답했다. “멋진 선배들과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죄송하네요. 이제 저만의 모습으로 인식시켜 드릴게요.” 사진출처=스포츠동아DB.
‘조인성과 박해일을 닮은 마스크’란 말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제훈은 “아, 민망하네요.”라고 답했다. “멋진 선배들과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죄송하네요. 이제 저만의 모습으로 인식시켜 드릴게요.” 사진출처=스포츠동아DB.

▷ "이병헌 선배에게 작품 선택 요령을 물었더니…."

이제훈은 뒤늦게 연기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춤을 좋아했던 그는 연극영화과를 꿈꿨지만 부모님의 만류에 고려대학교 생명정보공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갈증은 댄스 동아리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솔직히 불안했죠.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끝없이 고민했습니다. 가족에게 미안하기도 했어요. 이기적인 행동을 한 건 아닌지…."

그렇게 그는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연극원 08학번이 됐다. 늦깎이 신입생이 되기 3~4년 동안은 '내공'을 쌓기에 주력했다. 연기학원에 다니고, 극단에 들어갔다. 그는 일용직 노동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렇게 이제훈은 20대 초중반을 연기에 '올인'했다. 방송·연극·뮤지컬·단편 영화·광고 등 촘촘하고 다채롭게 필모그래피를 채워갔다.

"이병헌 선배님과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작품을 잘 선택해 왔는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주어진 상황, 역할, 작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앞날은 아무도 모르지 않냐.'고. 많이 느꼈어요. 저도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제 연기 인생을 길게 보고 하나하나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이에요."

“‘고지전’은 영화의 재미도 주지만, 돌아가실 때 생각할 거리도 얻고 돌아가실 수 있어요.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실 거예요. 많이 보러 오세요.” 이제훈은 마지막까지 영화 홍보를 잊지 않았다. 사진제공=이노기획.
“‘고지전’은 영화의 재미도 주지만, 돌아가실 때 생각할 거리도 얻고 돌아가실 수 있어요.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실 거예요. 많이 보러 오세요.” 이제훈은 마지막까지 영화 홍보를 잊지 않았다. 사진제공=이노기획.

▷ 이젠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도 찍고 싶어

그는 교복 연기를 해도 어색하지 않은 동안이다. 하지만 벌써 20대 후반. 대부분의 시간을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보낼 것만 같았다.

"에이, 아니에요. 연애도 하고, 즐기기도 했어요. 요즘은 좀 바쁘지만 쉴 때는 혼자 극장도 가고, 혼자 서점도 가고, 그냥 돌아다니고, 훌쩍 여행도 가고…. 댄스학원도 다녔어요. 지인들도 만나고. (너무 혼자 논다는 기자의 말에) 지금 여자친구가 없으니까…."

쑥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유난히 남자 복이 많았다. 장훈 감독과 닮은 점이기도 하다. 전작 '파수꾼'은 남자 고등학생 3명의 이야기였고, 이전 '친구사이?'에서는 여성스러운 성향의 동성애자 석이를 연기했다.

"여성 연기자와 로맨틱 코미디도 해보고 싶어요." "미모의 여성 연기자?" 라고 기자가 되묻자, 미모를 빼고 '여성 연기자'를 강조한다. 하고 싶은 여배우가 있느냐고 끈질기게 물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간절함(?)이 전해졌다. 대신 "어디까지 가고 싶으냐"며 목표를 물어봤다.

"음…. 없어요."

고개를 갸웃하자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한대로 가야죠. 배우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해야 하니까요. 어떤 지점에서 안주하고 그걸 만끽하면 안 되잖아요. 왕도가 없는 것 같아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어요."

동아닷컴 김윤지 기자 jayla301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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