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존을 향해/1부]<5>보수와 진보, 자기 진영을 비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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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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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존의 학습

《한국의 보수는 어떻게 보수(補修)해야 할까. 또 한국의 진보는 어떻게 진화해야 할까. 특별취재팀은 보수의 원로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과 진보의 지적(知的) 아이콘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각각 자신 진영에 ‘쓴소리’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들의 성찰과 고언(苦言)은 보수와 진보가 공존 화해할 수 있는 영역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貧者를 배려 않는 보수
진보의 복지철학 배워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절실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74)은 한국지성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그는 한때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1980년대 자신의 예측이 엇나가자 기존의 이론을 과감히 버렸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그는 뉴라이트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동시에 지금도 보수를 보수(補修)하기 위해 진보학자들과 교류하고 있다. 인터뷰를 한 15일에도 그는 진보단체인 사회민주주의연대가 주최한 ‘제헌과 건국, 그리고 조봉암’ 세미나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보수를 비판해 달라는 주문에 안 이사장은 “반공주의를 반성해야 한다”며 입을 열었다.

“한국은 보수의 절반 이상이 반공주의라는 게 문제예요. 반공주의가 우파의 전부가 아닙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국가보안법 등을 동원해 눌러야 한다고만 생각하지요. 하지만 북한과 협력하는 종북(從北)을 제외하고는 다양한 사상을 존중해줘야 해요. 사상의 자유 속에서 한국사회가 선진화할 수 있습니다. 그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이념적 토대인) 자유주의의 본질입니다. 자유주의자란 ‘자유주의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상이 옳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이죠.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듯 사상도 그래야 합니다. 내가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니니까 어떤 사람들은 나를 ‘위장한 빨갱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수는 반공주의를, 진보는 종북주의를 포기할 때 소통의 길이 열린다는 설명이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불법적인 대북 협력을 제재하는 데 한정하는 것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상의 자유 보장은 헌법이 규정하는 대한민국 체제를 인정한다는 전제 속에서 가능하다면서 일본 공산당의 예를 들었다. 일본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필수 요소인 혁명을 ‘헌법 체제 안에서 합법적으로 권한을 획득하는 행위’로 재해석하면서 일본 헌법 체제 속에 편입됐다는 것.

그는 “보수는 경쟁과 시장을 중시하지만 한계도 있다”며 “진보가 주장하는 복지 가운데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경쟁과 시장은 승자뿐 아니라 패자를 낳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경쟁의 조건이 동일하지 않아요. 사회적 조건이 ‘누구는 승자가 되고, 누구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돼 있습니다. 경쟁이 사회의 기본 조건이라면 자유경쟁을 제약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패자를 구제할 수 있는 구조 또한 만들어야죠.”

같은 맥락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하지 않는 한국 보수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을 사회 전체의 노력보다는 개인 경쟁의 결과물로 보기 때문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이 취약해졌다는 것.

“영주제가 발달한 서구와 달리 중앙집권제 아래 지주제가 발달한 한국은 가진 계층이 사회적 의무를 부담하는 전통이 짧았습니다. 영주는 영지 백성들로부터 충성을 받는 대신 전쟁이 나면 자신이 앞장서 희생했지요. 하지만 지주제 아래에서 공적 의무는 왕과 관료의 몫이었기 때문에 지주의 공적비용 부담 의무가 상대적으로 적었어요.”

현재의 보수정권에 대해서도 평가를 구했다. 그는 대통령을 만나서도 같은 발언을 했다며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정치가가 아니라 기업가적인 자질을 갖고 일을 하는 데서 정치적 혼란이 벌어지고 있어요. 정치의 핵심인 이해관계의 조정 과정을 ‘비생산적이고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일’로 여기는 겁니다. 눈앞의 효율을 따지기에 앞서 우선 반대쪽과 합의할 수 있는 부분부터 조정을 해 나가야죠. 길게 보면 그게 효율적입니다. 양보를 얻어내려면 반대쪽이 의견을 철회할 수 있는 퇴로도 열어줘야 합니다.”

그는 뉴라이트가 사상운동이 아닌 정치운동으로 일부 성격이 달라진 점에 아쉬움을 보였다. 이 점 때문에 그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참여했던 ‘뉴라이트’ 재단을 2008년에 ‘시대정신’으로 바꿨다. 그는 “사상운동이 정치운동이 되면 이익을 위해 주장을 양보하는 거래가 시작된다. 정치에 대해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사상운동의 자리”라고 말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 이념이 제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하는 일, 그것이 공존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北핵실험 옹호하는건
진보의 가치와도 모순
시장개방 필요 인정해야


조국 서울대 교수
조국 서울대 교수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45)는 적극적으로 ‘앙가주망(engagement·사회참여)’을 실천해오고 있는 대표적인 진보 학자다. 그는 본업인 형법에 천착하는 한편 세상사에도 꾸준히 관여하고 있다. 법이 세상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6일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그는 ‘진보에 대한 쓴소리’ 취지의 인터뷰를 앞두고 핵심 논점 몇 가지를 정리해 두고 있었다. A4용지 한쪽 분량의 그의 메모 제목은 ‘진보, 끝없이 성찰하며 21세기를 살아라’였다.

“‘범진보’의 성찰은 진보 스스로 내부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진보는 과거 반(反)독재·민주화를 계승했다는 이유로 사고와 노선, 정책과 도덕성에서 (다른 진영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과잉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올바름이란 주장으로 확보할 게 아니라 입증해야 하는 가치죠. 진보가 구호는 내놓지만 그 근거와 실현방법, 절차가 취약할 때가 많습니다.”

그는 “진보가 과거 권위주의와 전투적으로 싸우다 보니 권위주의를 닮아간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죠. 자신 속의 괴물과 싸우고, 그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조 교수는 진보 내부의 문제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민주노동당 내부 중요 정보를 북한에 정기적으로 보고한 ‘일심회’ 사건 △‘민주노총 충격 보고서’에서 드러난 민주노총 내부의 부패 문제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행 미수 사건 등을 들었다.

그가 제안하는 진보의 21세기적 지향은 경제적으로는 세계화 시대에 한국이 통상국가라는 점에 대한 적극적 인정, 정치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재인식으로 요약된다.

“한국은 통상국가입니다. 국제경제에서 고립돼 살 수 없어요. 시장을 개방하면 모든 게 잘된다는 보수의 주장은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개방은 나쁘다고 하기에는 한국 경제구조가 국제 경제에 깊숙이 연결돼 있는 게 현실이지요. 세계화 시대에서 한국 경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진보가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반대하면서 다른 국가와의 FTA에는 침묵하는 걸 보면 진보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해 정리가 안돼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FTA를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니라 양보할 수 없는 가치를 지켜내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ISD)’처럼 주권을 훼손할 수 있는 조항은 막고, 식량주권과 직결된 농업 등 취약산업은 보호하는 방법이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 조 교수는 무조건적 반북(反北)도 잘못이지만 주사파와 김일성주의자로 대표되는 종북 역시 잘못이라고 했다.

“민주노동당 일부에서 북한 핵실험을 ‘자위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전, 평화와 더불어 반핵(反核)은 진보의 핵심 가치인데 북한이라는 이유로 옹호할 수 없습니다. 정상적 정권 재창출 방법이 될 수 없는 3대 세습, 우상화, 인권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진보적 가치와 맞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북한을 비판하면서 교류의 끈을 놓지 않는 비북연북(批北連北) 노선을 제안했다. 평화공존을 전제로 점진적 변화를 요구하며 지속적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유럽 진보정당이 스탈린주의와의 차별화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온 것도 참고할 만하다는 것.

이 밖에 조 교수는 분열이 잦은 진보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만도 친노(親盧), 반노(反盧), 비노(非盧) 등으로 갈리잖아요. 대중이 이런 진보를 보면 헷갈리지요. 민주당과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각각 소(小)통합을 이루는 등 ‘통 큰 정치’가 필요합니다.”

그는 저서 ‘보노보 찬가’에서 진보의 마음과 행동에 ‘번짐’의 미학이 필요하다며 다음의 시를 인용했다.

“너는 내게로/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번짐,/번져야 살지.”(장석남, ‘수묵정원9-번짐’)

번짐, 조 교수가 꼭 진보에게만 호소하는 가치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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